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 수원화성 걸어본다 17
김남일 지음 / 난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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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60이 넘어서야 마침내 온전한 화성(華城) 일주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김남일 작가의 책이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17번째 책이다.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배수아의 알타이, 한은형의 베를린 등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김남일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은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책은 김남일 작가의 문학적 표현과 수원 화성과 정조(正租)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 화성은 원래 수원성으로 불리던 곳이다. 화성에는 치()가 있다. 꿩처럼 몸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성곽 바깥에 철(: 볼록할 철)자 형태로 약간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을 가리킨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로 바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떻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정감이 생겨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느낀 만큼 알려 하고 그런 만큼 보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곽의 낮은 담을 여장(女墻) 또는 타(), 우리 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성가퀴에 세 개의 총 구멍이 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 양 옆 구멍은 원총안이다.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누각이다. 저자는 만일 카프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다른 작품은 몰라도 결코 ()’ 만큼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땅 어디에도 저 멀리 고딕체 글씨처럼 우뚝 솟은 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조선의 성은 높이가 아니라 둘레와 길이로 권위를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은 우뚝 솟은 성채가 아니라 상실을 또 다른 기의로 갖는다며 인조(仁祖) 이야기를 한다.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의 남색 옷을 걸치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선 인조는 그들이 정한 법에 따라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만은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이란 함벽여츤(銜璧如櫬)을 말한다. 손을 뒤로 묶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관을 뒤집어 쓰는 치욕이다.

 

젊은 저자에게 성을 오르는 일은 폐허를 밟는 일이었다. 암문(暗門)은 벽돌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포루(鋪樓)는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이다. 치성(雉城)에 있는 군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포루(砲壘)와 동음이의어다. 1795년 정조는 야간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야간 훈련시에는 매화(埋火) 즉 땅에 묻은 화약이 밤하늘에 치솟았다가 마치 매화꽃이 일시에 떨어지듯 떨어졌다.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동문은 창용문, 서문은 화서문이다. 화홍문은 북쪽 수문이다. 화령전(華寧殿)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다.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를 서장대로 부르고 연무대를 동장대라 부른다. 정조가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만든 국영 농장인 둔전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 한다.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29 페이지) 그런 감각으로 저자는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 서문이라 말한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이다.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셋이지만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 1797년 정월 정조는 공심돈 앞에서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건물이라.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을 했다.

 

동북각루로 지어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예전 수원에서는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89 페이지) 정조는 북문인 장안문을 설계도와 다르게 200미터나 옮겨 쌓도록 했다. 화산(華山)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200여명의 백성들의 집을 피해 짓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화성은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사(頒賜)는 임금이 물건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흰떡, 수육, 부채, 척서단(滌暑丹), 솜옷, 털모자 등을 나누어 주었다.(: 씻을 척) 당시에 귀마개, 털옷 등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정조는 즉위년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왕의 침전이자 서재인 존현각(尊賢閣)에 난입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노론 영수 홍상범(洪相範)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홍상범에게 매수된 호위군관, 도성 무사들, 심지어 액정서(掖庭署) 소속들까지 가담했다.

 

후일 정조가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홍상범은 책형(磔刑)으로 죽었다. 동북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인해 소라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자는 사회 과목 성적도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행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일은 기억과 기록 사이를 걷는 줄타기와 같다. 이때 기댈 수 있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되었고, 고종(1899)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해이다. 사도(思悼)는 영조가 내린 시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것은 1789년의 일이다. 정조는 현륭원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애통해했다.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출생지는 화령전 인근 어디쯤이다. 저자는 나혜석의 단편 소설인 경희를 읽고 시대와 맞섰던 그녀의 당당한 불화에 감탄했다.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독특한 책이다. 작가 개인의 기억과 문학적 표현들과 화성과 정조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어우러진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 내서 책에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 나혜석, 발터 벤야민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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