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 조선 왕릉 편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이종호 글.사진 / 북카라반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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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다. 지난 2009년 북한의 두 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북한의 두 기는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이다.) 조선 왕릉의 공간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제향 공간과 능침 공간이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이 아닌 측면에 둔다.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2개이고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의미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이고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가 있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정자각 북서쪽에 제례를 끝내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예물을 묻는 예감(瘞坎)이 있다. 진시황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이라 했고 한()에서는 능이라 했다. 조산(祖山)은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를 말한다. 안산(案山)은 집터나 묘의 맞은편 산을 말한다.

 

가장 큰 문무인석은 철종의 예릉, 장경왕후의 희릉에 설치된 3미터 높이의 석상이다. 비교적 후대에 속하는 철종의 능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위엄 있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망주석은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세운 것으로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운다. 멀리서도 쉽게 알아보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태조 이단(李旦)의 능은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 왕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을 모델로 조성했다. 동구릉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건원릉은 능호가 유일하게 두 글자인 능이다.

 

건원릉에는 소전대(燒錢臺)가 있고 태종 이후에는 예감으로 대치되었다. 건원릉 봉분에는 특이하게도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이 현릉(顯陵)이다. 문종이 세조와 연관된 의관 전순의에 의해 반하(半夏)를 즐겨 먹은 꿩고기로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꿩은 닭, 오리 등과 함께 기름이 과다한 고기로 종기가 났을 대 금기임에도 전순의는 문종에게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

 

현릉의 석물들도 많이 퇴화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화강암은 강도가 7로 매우 단단하지만 장석, 운모, 석영 등으로 되어 있어 풍우에 퇴화하기 쉽다. 장석은 빗물에 오래 노출되면 녹아버린다. 이 까닭에 화강암은 기본적으로 내장재로 쓴다. 수많은 서양 건물이 수천 년이 넘었는데도 원형이 보존된 이유는 균질한 재질의 석회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이 목릉(穆陵)이다. 선조는 41년을 재위했다. 광해군은 권정례(權停禮)로 세자가 되었다. 권정레는 약식(略式)을 의미한다. 의인왕후는 인종 비 인성왕후, 명종 비 인순왕후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셨고 후궁 소생인 여러 아이에 대해서도 지극한 은애(恩愛)를 보이는 등 부덕을 갖추었지만 소생 없이 사망했다.

 

선조 능의 석인은 조선 시대 석인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08년에 장인(匠人)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顯宗)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 숭릉(崇陵)이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선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 현종이다. 명성왕후 김씨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현종 사후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해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에 완성된다.

 

1680년 서인이 (1674년 갑인예송으로 집권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경신환국) 서인 중심의 실록 개수청이 설치되었고 1683년에 현종개수실록 28권이 완성되었다.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은 수정 실록이고 현종은 유일한 개수 실록이다.(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 개수실록은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는 것이다.)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 원릉(元陵)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서오릉에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우측을 비워두었지만 정조가 신하들의 적극 추천을 받아 동구릉 내에 영조의 능지를 마련했다. 원래 원릉 자리는 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쓸 수 있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 휘릉(徽陵)이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이 혜릉(惠陵)이다. 동구릉 내에서 유일한 원()이다. 경종 즉위 후 단의빈에서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헌종(憲宗)과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 경릉(景陵)이다. 문조(文祖)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이 수릉(綏陵)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 홍릉(洪陵)이다. 순종과 순명효왕후 민씨, 순정효왕후 윤씨(해평 윤씨)의 능이 유릉(裕陵)이다.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 남양주의 사릉(思陵)이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소나무)이 둘러싸고 있다. 사신사(四神砂)의 현무(玄武)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116 페이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 광릉(光陵)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 명릉(明陵)이다. 숙종의 능과 인현왕후 능침 사이 양측에 문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다. 다른 능의 문인석과 달리 키가 실물 크기인 170센티미터 정도로 간소하게 만들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조성된 것이다.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 한씨의 큰 고모가 명에 공녀로 갔다가 영락제의 후궁이 된 청주 한씨(한확의 여동생)로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고 하지만 처형과 다름 없는 자살이라는 말이 있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봉분의 지름이 가장 크지만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 석수, 무인석이 없어 매우 간소하다.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의 능이 창릉(昌陵)이다.(예종의 첫 번째 비가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다.) 창릉이 선정될 때 신하들은 위치가 나쁜 것을 알고도 방조했다. 정인지가 반대했지만 거부되었다. 원조(元祖)인 중국과 달리 우리 땅을 배경으로 우리가 만든 풍수를 자생풍수라 한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 익릉(翼陵)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가 그의 아버지다. 익릉은 서오릉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 홍릉(弘陵)이다. 서삼릉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의 능역으로 조성되었다.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다.

 

원래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이 자리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으로 옮겨갔고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이 조성되었다.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인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효릉은 축협 관할 안에 있어 비공개라고 한다.)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은 구역이 다르고 넓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도령으로 더 유명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철종이 태어난 곳은 한성부 경행방. 철종이 다른 가족들과 함게 강화도로 유배간 것은 14)

 

원범이라는 이름의 강화도령이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로 23세의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원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도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들이 원범을 자신들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종은 14년간 재위했는데 3년은 대왕대비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 이후로는 안동 김씨들의 세력에 눌려 허수아비 왕으로 살았다.

 

철인왕후 김씨는 21세에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만에 사망했다.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였다. 그녀를 왕비로 천거한 사람이 순원왕후였다.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 세력들을 위해 주청을 계속하는 바람에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었다. 철종은 이후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죽은 지 15년만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예릉은 조선 왕조의 상설 제도를 따라 설치한 마지막 능이다.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 능의 법식을 따라 설치했다. 예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된 쌍릉이다. 무인석과 문인석이 한 단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도는 원래 2도였으나 고종이 대한제국 시절 태조, 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추존한 뒤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며 3도로 만들었다.

 

조대비가 중종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했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을 재사용해 예릉을 만들었다. 예릉 좌측에는 문효세자(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의 효창원과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의령원이 있다.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안에 있었고,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는데 각각 1944, 1949년에 이장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2)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의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데 이어 단경왕후도 폐비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행운의 인물이다. 장경왕후는 세자인 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경복궁 별전에서 사망했다.(빈은 정 1, 귀인은 종 1, 소의는 정 2, 숙의는 종 2, 소용은 정 3, 숙용은 종 3, 소원은 정 4, 소원은 종 4.)

 

장경왕후의 첫 능지는 태종의 헌인릉 옆의 산줄기였다. 장경왕후는 15153월에 사망했다. 왕과 왕비의 능 조성 방식에 따르면 5개월 장을 치러야 하는데 두 달만인 4월에 매장을 마쳤다. 5월에는 좋은 날이 없고 6월은 장마철이라 땅이 질 염려가 있고 장지로 갈 때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경왕후의 능 조성은 중종이 맡았다. 장삿날 한강에 500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넜다.

 

장경왕후의 능은 중종 32년인 1537년 서삼릉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인종의 누나)와 김안로의 아들 희가 혼인을 했다. 김안로 즉 중종의 사위는 권력을 남용하다가 영의정 남곤 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갔다가 복귀해 장경왕후 국장 당시 책임자였던 남곤을 공격하기 위해 풍수지리상 돌이 광(구덩이)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 희릉 광 밑에 큰 돌이 깔렸는데도 공사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말이 듣지 않던 중종도 자신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말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김안로는 위세가 왕을 넘어설 정도였고 문정왕후의 폐위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제거할 때처럼 밀지를 내려 기습적으로 김안로를 잡아들였다. 김안로는 유배당한 뒤 곧 사사되었다.

 

희릉은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만 둘렀지만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랐다. 효릉(孝陵)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이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인종은 재위에 오른 다음 해인 1545년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세자 시절 반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버지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의 소생 복성군이 이미 장성한 상태였고 야심이 많은 문정왕후 등에 둘러싸여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세자를 저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김안로가 집권함에 따라 세자의 지위는 안정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자 위기감을 느낀 김안로가 중전 폐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어 다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24년의 세자 시절을 보낸 뒤 중종이 죽은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는 동안 거의 음식을 대지 않아 급격히 쇠약해져 병이 들었다. 병세가 심했음에도 극구 약을 먹지 않았다. 1546년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후사 없이 재위 8개월만에 경복궁에서 사망했다. 경원대군이 명종이다.(예종: 13개월 재위)

 

인성왕후 박씨는 64세까지 살았다. 인종은 성품이 바르고 착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한밤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 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인종은 계모 문정왕후의 소행임을 직감했지만 자신을 길러준 문정왕후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하고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중종이 애타게 부르자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께는 불효라 생각하고 불길을 뛰쳐나왔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의 옆에 묻혔다. 명당 중의 명당이었는데 문정왕후가 남몰래 그곳에 며칠간 물을 붓게 했다. 능에서 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자 마침내 명종 17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승려 보우가 승려들을 동원해 중종의 왕릉을 옮겼다. 공사를 맡은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이 엄청난 돈을 빼돌렸다.

 

1501년 생인 유명한 세 사람이 있다.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문정왕후(文定王后). 남명 조식은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해 광해군 때 성세를 누리다가 인조반정과 더불어 죽거나 유배를 갔다. 조식은 수제자 정인홍이 광해군과 손잡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바람에 오명을 썼다.

 

조식은 56세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양하면서 문정왕후를 일게 과부로, 임금인 명종을 어린 고아라 불러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자신 때문에 왕이 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며 매를 들기도 했다.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정해진 것은 인종의 유언 때문이다. 인종은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 부왕께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 근처에 내 묘를 써라. 또한 내 장사는 소박하게 지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처음 중종은 장경왕후 옆에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중종을 지금의 삼성동으로 옮겼다. 문정왕후가 중종을 희릉에서 삼성동 정릉으로 옮긴 것은 자신이 그 옆에 묻힐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을 선릉(宣陵)이라 하고 중종의 능을 정릉(靖陵)이라 하는데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기도 했다.

 

정릉은 특히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이 어머니를 태릉에 안장해 결국 문정왕후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등 그의 비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과도 함께 있지 못했다. 중종은 삼성동 정릉, 단경왕후 신씨는 홀로 양주 온릉에, 장경왕후 윤씨는 홀로 서삼릉 희릉에 문정왕후 윤씨는 아들 명종과 함께 노원구 태강릉에 자리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종이 왕후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까닭에 직계자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중종 아들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에게 돌아갔다. 명종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했다. 하원군, 하릉군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거절해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하성군이 선조다. 덕흥군은 사후 덕흥대원군이 되었다.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선조가 인종 곁에 인성왕후를 장사지내며 왕릉의 개수를 명해 병풍석을 둘렀다.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는데 수많은 왕릉 조각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선조의 아버지 덕흥군과 인종이 형제간이다.)

 

숙종 30년 효릉에 검은 담비가 나타나 수라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자 종이 불을 지펴 연기를 내 잡으려다 불을 냈다, 불은 능상까지 번졌다. 불을 낸 사람은 사형당했고 가족, 관리자. 참봉 등은 천민으로 강등되어 귀양을 갔다. 이에 숙종은 3일간 업무를 중단하고 모든 관리들이 제사 때 입는 옷을 입었다. 효릉 인근에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가 있다.

 

원래 이 묘는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경희대 공사 때 희릉 옆으로 옮겼다. 연산군 어머니가 묻힌 곳은 회묘였다가 연산군이 즉위해 회릉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다시 회묘가 되었다. 파주 심릉은 공순영릉이다. 순릉(順陵)은 성종 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공릉(恭陵)은 예종 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장순왕후의 후임자가 청주 한씨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 한씨다.(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위해 지은 궁이 창경궁이다.) 영릉(永陵)은 진종(효장세자)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온릉(溫陵)은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파주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능이다. 김포 장릉(章陵)은 원종(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태릉(泰陵)은 문정왕후의 능이다. 강릉(康陵)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의릉(懿陵)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릉(宣陵)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정릉(靖陵)은 중종의 능이다. 정릉(貞陵)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장릉(莊陵)은 단종의 능이다. 융릉(隆陵)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다.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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