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 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17세기 지식인들의 계보를 훑은 책이다.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 김육(金堉), 장유(張維), 송시열(宋時烈), 윤휴(尹鑴), 유형원(柳馨遠), 이현일(李玄逸), 남구만(南九萬),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형제 등을 조명했다. 김장생은 송익필, 이이, 성혼 등 서인(西人) 학문의 기초를 세운 세 사람에게서 고루 학문을 배웠다. 김장생은 자신을 노둔(魯鈍: 굼뜨고 미련함)하다고 평했다.

 

그런 그에게 지적 원천으로 작용한 것은 꾸준한 독서였다. 김장생이 생전에 거둔 문인은 아들 김집을 비롯 송시열, 송준길, 장유, 최명길, 김류 등이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을 비롯 이황, 이이, 박세채, 송시열, 이언적 등이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여섯 사람이다. 김장생, 김집은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부자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덕치는 조광조, 도학은 이황, 학문은 이이, 의리는 송시열, 예학에서는 김장생을 동국제일로 꼽았다. 김장생, 김집 부자는 이이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 예학의 태두로 한 시대와 산림정치를 열었다. 그들 대에 체질이 바뀐 서인의 일부는 17세기 후반 노론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에도 사대부층의 주류를 이어갔다.

 

산림(山林)이란 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 또는 산림독서지인(山林讀書之人)의 줄임말이다. 재야의 학문과 덕행이 높은 선비의 의미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천거에 의해 등용된 재야의 학자다. 산림의 전형이 정인홍(鄭仁弘)이다. 유학(儒學)의 숙제는 성인과 군주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틈을 메우는 것이었다.

 

1) 재주와 학덕을 겸비한 군주가 성왕을 표방하는 것, 2) 재상권을 중시하는 것, 3) 산림을 통해 세도(世道: 세상의 도)를 구현하는 것 등이 대안으로 꼽혔다. 1) 즉 군주성왕론을 이론까지 정연하게 아울러 국왕이 유학의 도통을 계승했다고 천명한 사례가 영조와 정조의 경우다. 2)의 대표가 정도전이다. 3)의 방식은 야인에 가까웠던 공자의 스타일이었고 사대부 중심 유학인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전형적 모델이었다.

 

산림은 사대부의 공론이 아닌 자기 정파의 여론만을 대변하는 난맥상을 보였다. 서양의 에티켓이나 매너가 자율적 개인 사이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것 즉 공존을 위한 수단이나 기능의 의미가 강한 반면 유교의 예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덕성이 외면적 질서로 드러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도덕 수양의 외화물이고 국가 차원에서는 덕치의 상징이었다.

 

왜란과 호란 후 사상계 전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당위가 생겼다. 예의 실천, 그 실천의 기준이 국가 전통이어야 하는가, 고례(古禮)여야 하는가, 성리학에 두어야 하는가를 두고 수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예송(禮訟) 논쟁이 대표적이다. 대동법을 주장한 김육은 도학의 시대에 드물게 존재했던 제도개혁파였다.

 

북인인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서 출향(黜享)할 것을 주장하자 김육은 정인홍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한 뒤 동맹 휴학인 공관(空館)을 감행했다.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남인, 김육은 서인이었다. 김육은 소년기에 임진왜란을 겪었다. 이때 부친을 잃었고 임난 후에는 모친을 잃었다. 김육은 30대 후반 경기도 가평 잠곡(潛谷: 가평 청평)에서 10년간 농사를 지었다.

 

그곳에서 김육은 회정당(晦靜堂)이란 작은 집을 지었다. “군자는 험난한 상황에서도 천하를 경륜할 준비를 축적하면서 지극히 곤궁한 생활도 달게 여긴다. 소리를 거두고 빛을 갈무리하여 텅 비고 자취가 없는 상태로 있으니 그가 있는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다가 급기야 기운이 무르익어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 순식간에 번쩍이면서 산악을 뒤흔들고 하늘을 온통 환히 밝히니 이 기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회정의 작용이다.”

 

후배 장유(張維)의 해석이다. 기운은 순환하게 마련이니 어둠<> 다음에 밝음이 오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움직이게 마련이다. 회정에는 세상을 경륜할 때를 기다리며 곤궁을 달게 여기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저자는 잠곡(潛谷)의 김육은 잠룡(潛龍)을 꿈꾸고 있었던가라 말한다.(57 페이지) 중년에 접어든 김육이 안목을 크게 넓힌 계기는 병자호란 발발 직전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였다.

 

당시 나이 57, 조선이 명에 보낸 마지막 사신이 김육이었다. 명에 다녀온 이후 그는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대동법 확대 시행을 강력 건의했다. 대동법은 현물로 받던 공물을 쌀이나 포()로 받은 제도다. 이 제도는 토지를 단위로 부과하는 것이어서 대토지 소유자들의 반발을 샀다. 방납 등으로 부당 이득을 취했던 서리(胥吏)와 그들과 이익을 공유했던 관리들도 문제였다.

 

김집은 대동법 시행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시행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덕성으로 인한 교화라는 이상적 원칙을 강조하다 보니 제도 개선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대동법 시행에서 이이의 뜻을 따른 사람이 김육이었으니 김집은 사조(師祖)의 뜻을 놓친 것이리라.

 

김집의 뒤를 이어 서인 산림을 대표한 송시열은 대동법을 옹호하며 스승 김집의 오류를 인정했다. 김육은 나는 어리석고 생각이 얕아 학문이 어떠한 것이지 잘 모른다. 다만 바라는 바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일처리를 실질적으로 하는 것이니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고 부역과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공허하고 멀리 있는 것을 추구하여 뜬 구름과 같은 글은 숭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인조반정에 주역으로 참여한 장유는 병자호란 중에 최명길과 함께 강화(講和)를 주장했고 전란이 끝나고 모친의 상중임에도 삼전도비문을 작성했다.(최종 채택된 것은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장유의 딸이 효종 비 인선왕후 장씨다. 장유는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 풍토에 반발하고 유불도(儒佛道)를 넘나둘었던 자유 사상가이자 양명학의 선구자로 주목받았다.

 

장유는 불가해한 세상사를 끝없이 물었다. 주자학은 주희 생존시에는 거짓된 학문<위학: 僞學>으로 비판받았지만 원나라에서 주자가 집주한 사서를 과거 시험의 기본 교재로 사용하면서 관학의 지위에 올랐다, 장유가 살았던 시대는 정파와 학파의 연계가 미약했던 시대다. 허균이 타고난 감성을 그대로 표현하자고 주장해 일대 파란을 낳았다면 장유는 허균처럼 인간의 진솔한 감정 표현을 강조하면서도 도덕적 정서와 수양을 강조했다.(88 페이지)

 

저자는 사대주의를 추구했던 조선인들과 현재의 우리 중 누가 과연 주체적인가를 묻는다. 사대(事大)란 맹자에게서 나온 개념이다. 물론 이는 사소(事小)와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예에 기반한 쌍무적 책임을 동등하게 가지는 질서였다. 송시열은 실록에 3000번 정도 기록된 인물이다. 살아서 2000, 사후에 1000회에 육박했다. 그가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것은 83세의 나이, 압도하는 풍모,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친 정치적 이력, 율곡학파를 주류에 올려놓은 학문적 업적 등으로 인해서다.

 

그는 평생을 두고 싸웠다. 학문을 두고 싸웠고 예법을 두고 싸웠고 국가 운영을 두고 싸웠다. 그는 일방 편향과 독점으로 특징지어진 인물이다. 2차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은 예를 그르쳤다는 공격을 받아 장기로 유배되어 약 5년을 보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에 반대하다가 유배당하고 사사되었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가 절정을 이룬 것은 정조대였다.

 

그가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것은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 때문이었다. 정조는 송시열을 대뜸 주자의 후인(後人)이자 현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송시열은 금()에 대해 북벌을 주장한 남송(南宋)의 효종과 같은 묘호(廟號)를 사용하자고 제안해 관철시켰다. 윤선도가 송시열 등의 차자(次子) 강조 논리를 효정의 적통(嫡統) 부정 노리로 비약시켰다.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음으로써 빚어진 2차 예송 논쟁에서 현종은 경국대전의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복제를 결정하고 지난 날 기해예송까지 거슬러 판결해 송시열 등이 효종에게 잘못된 예를 시행했다고 비판했다.(115 페이지) 남인 집권기에 송시열은 주자의 저술을 보완하는 일에 매달렸다. 윤휴 등을 의식한 나머지 남인의 득세를 세도의 무너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막역한 친구였던 윤선거의 아들이자 제자였던 윤증과도 대립했다. 이를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송시열이 회덕(懷德), 윤증이 니성(尼城)에 살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김익훈 사건과 회니시비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섰다. 김익훈은 송시열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다. 송시열과 효종이 북벌 논의를 했거니와 박지원은 명분으로만 굳어진 북벌론을 배격한 반성적 북벌, 그리고 대안으로서의 북학을 추구했다.

 

학계에서는 윤휴를 탈주자주의자에서 주자상대주의자까지 다양하게 규정한다. 병자호란의 충격으로 윤휴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열중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백이(伯夷)에 비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학문 태도는 달랐다. 효종이 죽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어진 1차 예송 논쟁 때 윤휴는 자의대비도 효종의 신하였으므로 마땅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의리는 없다는 주자의 견해를 들어 윤휴를 비판했다.(138 페이지)

 

윤휴는 주자의 학문적 공적을 인정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해석했으니 조선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문(斯文: 유교의 도의나 문화) 시비가 가장 치열했던 시기가 17세기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규정했다. 유형원의 아버지 유흠은 21세에 과거에 급제한 재사(才士)였다.

 

유형원이 태어난 이듬 해 인조반정(1623)이 일어났고 부친 유흠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28세에 옥사(獄死)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 하나만으로도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겼다. 이 책은 거시 국가 개조론이라 할 수 있다.(165 페이지) 토지에서 노비제까지 당시 조선에서 이처럼 웅대한 구상으로 제도 개혁을 논한 책은 없었다. 물론 그 구상이 유형원 개인의 온전한 창조물일 수는 없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유형원의 구상에 주례(周禮)가 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166 페이지) ‘주례의 작자는 주나라의 기초를 놓은 주공(周公)이라 생각되었고, 따라서 그 방책을 실현한 주나라는 이상 국가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저술 시기를 전국시대에서 전한(前漢) 사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례는 전국시대에서 전한에 이르는 시기의 이상적 국가관을 반영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주례의 방식대로 공유를 실현한다면 그것은 사유에 기반해 지주로 존재했던 사대부들의 존립 근거를 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례의 이상을 구현하려한 사람들은 대개 실패했다. 북송의 왕안석이 그랬고 조선 초 정도전이 그랬다. ‘주례의 핵심이라 할 정전제(井田制)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정당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실현 가능성에는 회의적이었다. 주자도 그랬다.

 

유형원의 학문을 이익이 계승했고 그것은 정약용에게로 이어졌다. 정조도 유형원의 애독자였다. ‘반계수록에 대한 평가의 절정은 화성(華城) 건설에서 나왔다. 유형원은 반계수록보유(補遺)편에서 수원부를 북쪽으로 옮기고 성곽을 건설할 것을 주장했는데 화성은 그의 예언대로 옛 수원부의 북쪽 즉 팔달산 동쪽에 건설되었다. 정조는 화성 건설의 대강뿐 아니라 구획 정리나 건설비용 마련 등의 구체적 방책까지도 100년 전에 쓰인 반계수록과 일치하는 것을 보고는 그를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듯 하다고 감탄했다.(173 페이지)

 

현재 실학과 실학자의 정체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의문은 실학자로 규정된 개개인의 삶, 지향, 저술의 정확한 의미 등을 정밀하게 연구할수록 커지고 있다. 그들은 대개 성리학을 보완하는 이론, 성리학적 질서를 보완하는 사회 개혁을 주장했음이 실증되고 있다.(179 페이지)

 

갈암 이현일(李玄逸)은 기사환국으로 인해 두 번째로 세워진 남인정권을 대표하는 산림이었다. 이현일은 경기, 충청 지역에서 주류가 된 율곡학파는 비판하면서 영남에서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까지 외연을 확대하려 했다.(193 페이지) 남인은 탁남, 청남으로 나뉘었었다. 탁남(濁南)은 허적을 영수로 한 관료적 성격이 짙은 일파였고 청남은 허목, 윤휴를 영수로 한 산림적 성격이 짙은 일파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란 시조로 유명한 사람이다. 저자는 남구만을 보면 정철과 윤선도가 떠오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그들은 가사와 시조 문학의 최고봉으로, 관동의 신선과 보길도의 고고한 선비로서 다가온다. 그런데 정치 행적을 대입하면 그들의 이미지는 야누스처럼 바뀐다.(213 페이지)

 

정철은 기축옥사를 험하게 처리했고 윤선도는 예송논쟁을 종통 문제로 비화시켰다. 남구만은 정치적 이미지가 문학적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은 드문 경우다. 죽음을 부르는 상황까지 격화된 정쟁에서 그는 끝까지 온건론을 펼쳤다.(214 페이지) 저자는 안동 김씨가 아무런 노력 없이 왕실과의 혼인이라는 행운만으로 세도가의 정점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 말한다.(243 페이지)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 형제는 안동 김씨였다. 김창협의 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1689년 기사환국이었다. 영의정인 부친 김수항은 사사되었고 영의정을 역임했던 둘째 아버지 김수홍은 유배지에서 죽었다.(249 페이지) 부친의 죽음을 절절히 자책하며 영원히 농부가 되겠다고 다짐한 상소대로 김창협은 경기도 영평에서 농암(農巖)으로 자호(自號)하며 은거했다.(249 페이지)

 

이후 그는 경기도 양주 지금의 미사리 북쪽변에 있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애서 아우 김창흡과 함께 많은 제자를 양성하다가 근처의 삼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농연(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성리학의 원칙을 지키며 문예 방면에서 새로운 조류를 만드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그들 주변에서 성장한 이병연과 정선 같은 이들은 조선의 정서가 담긴 미학에 천착했고 각기 시문과 미술에서 이른바 진경문화의 전성(全盛)을 실현했다.(261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