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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ㅣ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9
심재우 외 지음 / 돌베개 / 2013년 4월
평점 :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世子)의 세는 대를 잇는다는 의미다. 세자의 원어는 계세지자(繼世之子)다.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이라는 의미다. 고려시대에 태자로 불리다가 원 간섭기부터 세자 또는 왕세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자(元子)는 왕의 적장자로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일곱 건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 순조의 장자 효명세자 등은 요절한 세자들이다. 원자는 특별히 책봉할 필요가 없었으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원자에 책봉했다. 세자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지식과 인격수양을 위한 예비 기간을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은 원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문종은 세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사람들이다. 연산군은 부왕 재위시 태어난 첫 원자다. 성종 7년의 일이다. 의안대군은 1382년에 태어났고 부왕 태조는 1392년에 즉위했다. 양녕은 1394년에 출생했고 부왕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다. 문종은 1414년에 출생했고 부왕 세종은 1418년에 즉위했다.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문종(7년 10개월), 예종(1년 11개월), 광해군(6년 10개월), 경종(2년 10개월), 사도세자(13년 5개월), 정조(3개월), 효명세자(3년 3개월) 등이다. 대비의 수렴청정도 일곱 차례였다.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에 이루어졌다.
세자시강원은 서연(書筵) 즉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고 세자익위사는 세자 호위를 담당했다. 세자익위사는 태종 때 설치되었다. 성종 재위 중 원자의 양육과 교육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원자로 하여금 민간의 고통과 물정을 알게 하기 위해 사가로 내보내 교육시킬 것인가, 임금이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세자 책봉은 대체로 6, 7세에 이루어졌다. 세자 책봉 방법은 임헌책명(臨軒冊命)으로 규정했다. 임헌책령이란 원자가 정전의 뜰에 나아가 절차에 따라 책봉 받는 방식을 말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통의 차기 계승권자를 천하에 포고하는 것이다. 백성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세자는 국본(國本)으로 인식되었다. 세자 책봉일은 길일을 택했다. 그 이전에 책봉 사실을 종묘에 고했는데 이때 세자의 이름이 정해졌다.
책봉례를 할 때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었다. 일곱 가지 무늬가 새겨진 칠장복(七章服)을 입은 것이다. 칠장복은 곤복(袞服)이라고도 한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점을 쳐 길을 택해 거행했다. 습의(習儀) 즉 예행연습을 행했지만 실수가 빚어지기도 했다. 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렀다고 해서 성균관에서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양반 자제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은 유학의 스승인 공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하여 세자 역시 유학을 학습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만천하게 알린다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대성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 유생복인 청금복(靑衿服)을 입고 명륜당에서 속수례(束修禮)와 입학례를 거행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완결점에 세자빈이 있다. 왕실이나 일반민의 경우 집안의 주인은 여성이고, 그 주인 역할을 할 며느리의 존재는 중요하다. 세자빈이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잘해주어야 세자가 후계자 수업을 잘 받을 수 있고 그 위치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왕들은 스스로 왕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세자는 현왕을 이어 왕이 될 사람으로서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하는 한편 왕 자리를 절대 넘보아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세자 교육은 이 점을 늘 인식하게 하는 양면성을 띠었다. 법적으로 인정된 섭정으로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자의 대리청정이 있었다. 전자는 왕과 대비의 공치(共治) 차원이었고 후자는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차원이었다.
첫 대리청정 주인공은 문종이었다. 세자의 대리청정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적장자로 대통을 이은 왕이 많지 않았고 장성한 세자가 있고 현왕이 노년기에 접어든 상황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인조는 장성한 아들 봉림대군이 있었음에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의 평균 나이는 20.8세였다. 나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서른 살에 이르렀다. 청정 기간은 1년에서 13년까지이다. 평균 기간은 5.2년 정도로 수렴청정 평균 기간과 비슷하다. 왕이 나이가 많거나 질병 등으로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졌을 때 대리청정을 했고, 정국 전환의 의도를 가진 임금의 의도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고, 전란 중 대리청정을 했고(광해군, 소현세자), 불안한 세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한 경우에 대리청정을 했다.(경종, 정조)
정조의 대리청정은 3개월에 불과해 그의 통치가 대리청정 효과에 힘입은 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리청정은 세자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여지가 다분했다. 문종은 20년이나 세자로 있다가 28세의 장성한 나이에 청정을 시작했다. 경종은 29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가 사도세자(1735 – 1762)에게 부과한 대리청정은 양위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결정되었다. 영조 51년인 1775년 세손(이산)에게 내려진 대리청정 결정은 최초의 세손 대리청정 사례다. 당시 영조는 83세의 고령이었다. 1442년 대리청정기에 세종은 세자가 남면해 조회를 받고 신하들은 칭신(稱臣)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결국 동쪽에 앉아 의식을 진행하도록(서향하도록) 했고 칭신은 포기했다.
세종(재위 1418 – 1450)은 1447년 9월 2일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신하들의 세자에 대한 칭신, 세자의 남면, 신하들의 사배(四拜) 등을 관철시켰다. 사도세자는 13년 넘게 대리청정 했지만 부왕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3년여만에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세종은 대리청정을 수행하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감수했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권위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킨 세종은 양위 선언 한 달 전에 연희궁(延禧宮)을 수리하도록 조처했고 수리가 끝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은 1445년 1월 2일 경복궁에서 연희궁으로 갔다가 3월 13일 희우정으로 옮겼고 4월 12일 다시 연희궁으로 옮겨 10월 7일까지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 10월 8일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 가서 다음 해 1월 26일까지 거처했다가 다시 연희궁으로 행차했다. 연희궁, 희우정, 수양대군가, 효령대군가, 양녕대군가 등이 세종이 머문 곳들이다. 23개월이 넘는 기간에 세종이 시어소(時御所) 생활을 한 것은 무려 690일이었다. 세종의 시어소 생활은 건강을 되찾기 위한 피병(避病) 목적도 있었지만 세자가 정궁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사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로 하여금 정치적 장악력을 확실히 갖추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양위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조는 세자를 믿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려했던 세종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처음부터 전위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대리청정을 통해 양위 소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보다 소론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영조는 세자를 정치일선에 내세웠지만 뒤에서 소론을 중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당연히 노론이 소론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게 되었고 이에 사도세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하게 책망했고 부자 사이는 갈등으로 치달았다. 1752년 11월 29일 소론의 이종성이 영의정이 되자 노론계의 사간원 정언 홍준해가 상소를 올려 그를 극단적으로 탄핵했다. 당시 세자는 상소문을 돌려주며 타이르는 조처를 취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영조는 격노하여 홍준해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한편 세자를 크게 책망했다.
이때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임에도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는 것)하였고 그 때문에 몸이 몹시 상했다. 다음 달 소의(昭儀) 문씨 문제로 영조의 선위 파동이 일어났다. 영조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궁 소속의 나인이었던 소의 문씨를 총애했다. 소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선희궁)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가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계비)에게 질책을 당하고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있었다.
화가 난 영조가 항의의 뜻으로 선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는 그러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세자는 또다시 대죄하다가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부서지고 피가 나는 지경을 당했다.(인원왕후는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1755년 을해옥사(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가 일어나 소론이 대대적 타격을 받고 노론은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잡았다. 이에 영조는 친정체제를 강화했고 세자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1757년 2월과 3월에 세자를 후원하던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세자는 더욱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세자는 폐위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약원 도제조 김상로는 세자를 폐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로는 세자를 진찰한 후 세자의 몸 상태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다음 해 8월 명릉(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으로 능행길에 나섰던 세자가 비를 맞아 몸이 몹시 좋지 않자 돌아오는 길에 잠시 겅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를 세자가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참소했다.
영조가 세자의 폐위 전교를 승정원에 내리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계가 반대했다. 이에 영조는 이를 철회했지만 세자의 울화증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이후 왕과 세자는 화합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1760년 왕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겨가며 두 사람의 소통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며칠 후 습종(濕腫) 치료를 위해 세자가 온양 온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거병(擧兵: 쿠데타) 의심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세자가 관서 지역으로 미행을 떠나자 노론은 이 사건을 정치공세로 밀어붙였다. 1762년 액정별감 나상인의 형 나경언이 세자가 불궤(不軌: 모반)를 모의한다고 고변했다. 나경언은 동궁을 무고한 혐의로 참형당했지만 여파는 세자에게 떨어졌다. 사건 발생 20일이 지나자 영조는 휘령전 뜰에 세자를 불러 자진하도록 강요했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은 뒤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어린 세자에게 노회한 정치가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다. 세자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이런 부왕의 태도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가는 등 마음의 병을 키워갔다. 붕당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참사로 이어진 이 사건은 부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대리청정은 교육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효명세자는 자신의 정치적 모델을 할아버지 정조에게서 찾았다.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능행 정치도 효명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는 정치 운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조를 흠모해 그를 닮고자 했다. 효명세자의 죽음도 의문스럽다. 스무 살 전후의 똑똑하고 패기있던 효명세자는 비록 무능했지만 지지를 보내준 아버지 순조의 후원 아래 할아버지 정조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 안동 김씨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했다.
조선시대 세자는 왕실의 대를 잇고 왕조의 영속(永續)을 위해 보위를 이어가는 존재로 비창(匕鬯)이라 불렸다. 비창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의 명칭으로 대를 이어 종사를 받든다는 의미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아 국초부터 세자 교육에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중요시했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혈연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태조와 태종,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왕 외에도 왕비, 대왕대비, 친인척, 고위 관료 등 왕실을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이 세자의 정적이 될 수 있었다. 생모조차도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사도세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복형 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방석, 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동생에게 보위를 물려준 양녕대군 이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이조, 할아버지 인조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사도세자 이선,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떠돌던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과 질곡은 다양하다.
이들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다. 병사한 세자들이 아닌 쫓겨나고 죽임 당하고 떠돌아야 했던 세자들이다.(의경세자, 효장세자, 문효세자 등은 병사했다. 효명세자는 죽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34세에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았음은 물론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관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놀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시대 세자의 문학을 살필 수 있는 대표 인물이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다. 사도세자를 양육한 상궁 나인들은 대부분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를 모시던 사람들로 영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조선 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른 두 명의 세자가 있었고 이들에게는 서른 다섯 명의 적자 형제와 여든 아홉 명의 서자 형제가 있었다. 왕에게 세자가 없었던 사례는 단종, 덕종(추존왕), 예종(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인성대군. 인성대군은 세 살에 요절, 장순왕후는 인성대군 낳은 후 산후병으로 타계), 원종(추존왕), 헌종(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왕자 얻지 못하고 옹주 하나 얻고 사망), 철종(원자 이융준 생후 6개월만에 사망) 등이었다.
두 명이었던 사례는 태조에게 방석과 정종, 태종에게 양녕과 세종, 세조에게 덕종(추존왕, 의경세자)과 예종,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효종, 영조에게 진종(효장세자)과 장조(사도세자), 정조에게 문효세자와 순조 등이다. 선조의 세자 광해군과 동복형 임해군, 이복동생 영창대군 사이의 갈등은 주목할 만하다.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점점 나빠졌다. 선조의 위기의식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전쟁 상황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인심을 안정시켜 신망을 얻었다. 전쟁 후 광해군의 입지는 좁아졌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고 바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선왕 사후 5일 후에 입관을 하고 즉위식을 치르는 왕실 관행을 어긴 것이었다.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의식한 결과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였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자신의 세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해군의 세자는 영창대군에게는 조카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자신의 세자의 관계를 생각한 것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염두에 둔 결과다.
조선 시대의 서른 두 명의 세자에게 114명의 여자 형제(38명의 적자 형제, 76명의 서녀 형제)가 있었다.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고 궁으로 돌아왔을 때 영조와 사도세자는 악화일로의 관계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편애를 받는 화완옹주를 질투하기도 했다. 화완옹주는 그런 사도세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부추겨 영조를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게 했다. 영조는 신료들과 논의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왕비(정순왕후 김씨)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했다. 영조의 이어가 결정되자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칼을 어루만지며 이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칼로 너를 벨 것이라 말했다. 화완옹주는 울면서 앞으로 잘할 터이니 목숨만 살려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믿고 평양에 행차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여동생 화완 옹주를 통해 부왕 영조와의 갈등을 해소하기도 했지만 화완옹주로 말미암아 임오화변의 비극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세자 인종이 부왕 중종에게 폐서인된 이복 형제인 복성군, 혜순옹주, 헤정옹주(이상 경빈 박씨 소생) 등을 복권 요청한 것은 “화려한 아가위 꽃송이처럼 우애 가득한 형제”간의 사랑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