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릉(溫陵) 개방(11월 14일 이후) 소식을 듣고 양주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인 온릉은 그간 군사보호시설 내에 자리한 관계로 개방되지 않았었다. 양주시청 홈페이지의 관광정보 코너에 교통편이 안내되지 않아 검색을 거쳐 개인 블로그를 통해 알았다.
신씨가 세상을 떠난 것은 1557년으로 명종 재위시였다. 왕릉 조성 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중종반정으로 왕비가 되었지만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반정에 참여하지 않아 역적이 되는 바람에 신씨도 억울하게 즉위(왕후) 7일만에 쫓겨나 능이 아닌 묘(墓)의 주인공이 되었었기 때문이다.(신씨가 복위된 것은 영조 대인 1739년이다.)
양주는 신씨 친정의 선산이 있던 곳이다. 온릉은 따뜻할 온(溫)자를 쓴다. 평생 자식 없이 오로지 중종의 따스한 손길만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재영 지음 ‘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162 페이지)이라고 한다. 중종이 단경왕후의 집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자 단경왕후가 분홍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화답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다.
하지만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죽자 신하들 사이에서 단경왕후 복위 논의가 나왔으나 중종이 오히려 이를 물리치며 건의한 사람들을 유배보냈고 장경왕후 곁에 묻히고 싶어 하며 쌍릉 자리를 마련하라고까지 했다는 일화도 있다.(이종호 지음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 답사기 조선왕릉편’ 206 페이지)
중종 능은 처음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곁에 조성되었다가 중종과 함께 묻히고 싶어한 문정왕후에 의해 삼성동으로 천릉(遷陵)되어 정릉(靖陵)이 되었다. 정릉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태릉에 모셨다.
그러고 보니 중종, 장경왕후, 문정왕후 모두 홀로 묻히고 말았다. 굳이 따지자면 단경왕후까지 홀로 묻혔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흩어짐으로 직계자손이 끊어졌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명종 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 선조가 최초의 방계자손 왕이 되었다.(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었다.)
치마바위 전설과 함께 중종이 단경왕후 복위를 논의한 신하들을 유배보냈다는 이야기도 함께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어떻든 중종이란 인물은 참 미스테리한 왕이다. 온릉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중종이 미스테리한 왕이라는 이야기를 하니 주인공이 마치 중종인 듯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