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마고원에서 나온 김욱의 '책혐시대의 책읽기''왜 책 낭비만은 피하려 하는가'란 챕터가 있다. 낮에 알라딘 종로점에서 보고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나왔다. 충분히 읽지 않아 저자가 어떤 답을 제시했는지 모른다.

 

내가 저자라면 사람들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탄탄한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지식을 기능적으로 얻으려 하기에 굳이 책을 사서 옆에 두고 수시로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썼을 것이다. 책을 그렇게 대하기에 책이 비싸게 느껴지고 그래서 구입을 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파악하는 우리 시대는 책을 혐오하는 책혐(冊嫌)시대다. 앞 부분에서 내가 말한 풍경은 책을 통해 단편적이고 즉자적인 지식을 얻으려는 시대이기에 일정 정도 차이가 있다. 저자의 진단에 공감한다.

 

여기서 잠시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남자들이 갖는 여성 혐오의 내용을 이렇게 파악했다.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시하고 불결하다는 말은 클라우스 테베라이트가 아우슈비츠의 군인들이 유태인을 표현할 때 더러운, 흐르는, 점액질의, 붉은, 집어삼키는, 몰려드는, 내뱉는 등의 수식어 내지 동사들을 사용하여 피억압자들의 몸을 여성의 몸처럼 흐르고 물렁물렁한 것으로 표현했다는 글(김혜순 지음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203 페이지)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나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모자란 남자들을 읽어볼 것을 주문한다. 분자생물학자의 말이기에 편향된 면이 있겠지만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자는 모자란 여자라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남자는 수명이 짧고 쉽게 질병에 걸리며 정신적으로도 약하다는 것이다.

 

신이치는 남자가 여자를 섬기는 이유도 제시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남자가 자신을 압도하는 여성의 능력을 보고 섬길 수도 있고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 혐오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에노 치즈코와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각에는 접점이 있다.(참고로 말하면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사회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남성 분자생물학자다. 두 사람 다 일본인이다.)

 

치즈코의 논의에는 일리가 충분하다. 다시 책 이야기를 하면 남성이 여성에 의존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분노하고 원한을 갖듯 적극적으로 지식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지식의 높고 견고한 성채 앞에서 원한감정을 갖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김욱 저자를 이야기하자면 그는 비용과 시간을 들여 책읽기라는 수고를 하는 독자라면 각 분야 저자가 도달한 뛰어난 생각의 결과물보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하찮은 생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 분야 저자가 만들어낸 뛰어난 생각의 결과물을 발판으로 그럴듯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내기가 만만하지 않은 사람은 결국 책을 외면하는 것이리라. 김욱 저자는 진지한 독자는 결국 책과 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책만 보는 바보가 아니라 책에 담긴 지식을 지배하고 자신의 지혜를 성장시키는 독자가 되어야 하기 떄문이다.

 

그것을 위해 저자는 비판적인 책읽기와 글쓰기를 제안한다. 저자는 책을 만나면 책을 죽이고 넘어서야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책과 헤어져야 한다는 말은 부처가 한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라는 말을 생각하게 하고 책을 만나면 책을 죽이고 넘어서야 한다는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임제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후쿠오카 신이치와 우에노 치즈코의 생각이 만나듯 부처와 임제의 말 역시 만난다. 비판적으로 책을 읽고 비판적으로 쓰자. 그것은 자기 생각의 집짓기를 하는 과정이다.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오래 읽고 써왔지만 느슨해지고 상투적으로 변질되려는 나를 채찍질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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