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복궁의 역사코너에 ’1915년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개최. 조선총독부 박물관 건물 준공란 소개 글이 있다. 시정은 시정(施政)이니 1915년은 일본이 1910년 한일 병탄(倂呑)을 통해 우리에게 정치라는 시혜를 베푼 지 5년이라는 의미이다.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전하는 것이니 문제다. 일본의 논리를 인용한 것이라면 따옴표를 하든지... (합방을 병탄으로, 조약을 늑약으로 바꾼 것을 보라.)

 

모 신문 기사도 문제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넓은 행정 청사가 필요해진 조선총독부는 신청사 터를 물색했다.”는 기사다. 경복궁 사이트의 소개 글이 일본의 논리를 따라서 문제라면 이 신문의 기사는 조선총독부라는 주어를 사용했으면 그들을 주어로 하는 조선 병합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데 경술국치라는 말을 썼다. 경술국치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뜻이다. 즉 주체가 우리다.

 

어떻든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한 후 경복궁에 넓은 신청사 터를 잡았다. 일제는 1914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며 흥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지은 데 이어 총독부 청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1927년 광화문을 해체, 동쪽으로 이전했다.

 

근정문 너머로 보였던 조선총독부 건물 축은 경복궁의 중심축과 어긋나 있었다. 일제가 자신들이 지은 남산 조선신궁의 축에 맞추기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의 각도를 3.75도 비틀었기 때문이다. 흥례문이 돌아온 것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단행한 구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헐어버린 뒤였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기에 훼손되었고 1968년 복원되었다. 그러나 사라진 목조 부분을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었고 위치도 원래 있던 곳에서 북쪽으로 11.2, 동쪽으로 13.5떨어진 곳이었으며 각도도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틀어진 채였다. 2010년 광화문은 원래 위치와 모습을 찾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