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장충단로의 경동교회(*)에서 4월 10일 마태수난곡 전곡 연주회를 갖는다고 한다.(19시부터. 무료 관람) 사순절을 기념하는 특별 연주회다. 사순절이란 잘 알듯 부활절 전 40일간 금욕으로 참회하는 기간을 말한다. 40일이란 숫자는 금식과 기도로 이루어진 예수의 광야 40일을 연상하게 한다.
*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세운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 - 1987)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 설립을 주도한 강원용 목사 중심의 전도조직이었던 '선린형제단'이 간도 용정과 한반도 북부에서 활동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 장충동 현재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경동교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예수의 광야 40일을 권력은 밖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책에 의하면 계시받은 자의 삶(공생애)을 시작하기 전 예수는 살던 공간을 떠나 바깥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248 페이지)
이 부분을 활용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도서관 이야기를 썼다. 기독교의 로마 국교화 이후 수도사들이 사막으로 가 고행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고. 물론 기독교 국교화 이후 기독교가 초심을 잃고 권력자의 종교가 되어간 사실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사안이다.
예수가 13세에 부처의 법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에 갔다가 29세에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니콜라스 노토비치 지음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 참고) 논란이 많은 이야기다. 예수의 13세에서 29세까지의 시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예수의 인도행이 사실이라면 광야의 40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간적으로나 내용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스 노토비치가 쓴 ‘이사전(The Life of saint Issa)’을 번역한 책이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다. 흥미로운 점은 ‘이사전(The Life of saint Issa)’이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책이란 사실이다. 영지주의는 예수의 탄생을 육을 빌어 나타난 가현(假現) 즉 헛깨비(그 자체가 아닌 형상)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영지주의는 여성을 생사의 근원, 우주의 어머니, 신성한 창조의 진리를 내포한 존재로 본다. 페미니즘과 영지주의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통하는 부분과 소원(疏遠)한 부분도 있으리라. 영지주의에는 여성의 육체를 긍정하고 남녀 평등성을 회복하려는 현실적인 여성해방운동적 성격이 없다.
영지주의는 젊은 시절 내 관심의 주요 대상이었다. 현상학이나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의 영향으로 내가 영지주의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肉體), 영혼(靈魂), 영(靈)으로 이루어졌다.
영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육체는 세상에 버려지고 영혼은 인식(gnosis)을 획득한 다음 환생을 통해 충만으로 들어간다.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 영혼은 세상 종말까지 다른 육체들 속에서 윤회한다.(마들렌 스코펠로 지음 ‘영지주의자들’ 16 페이지)
철학자 강미라는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하던 시절 프랑스의 거의 모든 대학의 철학과에서는 베르크손을 비중있게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들의 지적 배경에는 후설 뿐만 아니라 공통적으로 베르크손도 있다.
강미라에 의하면 그들의 영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무리지만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관계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 몸을 객관화하는 대신 살아 있는 몸으로 파악함으로써 생명체로서 목적이 있는 운동을 하는 능동적인 몸을 이해할 수 있다.(‘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74 페이지)
영지주의에서 만날 수 있는 창조주로서의 신(神)이 데미우르고스다.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를 본(本)으로 하여 본의 모방물을 만들어내는 곳이 코라라면, 코라는 이데아를 지향하는 감성계의 사물들이 생성, 소멸하는 장소로서 이데아라는 영원성이 실현되는 현실적 장소다.(‘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 41 페이지)
하이젠베르크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파라데이그마라는 설계도를 따라 물질 공간인 코라를 빚어 세상을 만들 때 설계도대로 전적으로 따르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보고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해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플라톤은 보편자가 개별자보다 앞서며,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을 통해 비로소 읽히고 이해된다고 보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인식이 작동되기까지는 개별적인 것이 먼저 알려지고, 그 개별적 이해를 바탕으로 보편자 인식에 이른다고 보았다.
플라톤 철학을 계승한 어거스틴은 계시와 선험을 강조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재구성한 아퀴나스의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경향에 힘입어 다분히 경험적이고 귀납적이었다.(이영진 지음 ‘철학과 신학의 대화’ 30 페이지)
플라톤이 시인 추방론을 펼쳤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플라톤에게 진짜는 형상이고 현실은 형상들을 불완전하게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이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형상을 구현(具顯)한다고 보았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1 페이지)
플라톤이 창조 신화를 통해 공간이 설명하는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간은 현실적 사물과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공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 42 페이지)
나는 내가 영지주의에서 페미니즘과 현상학으로, 또는 구조주의에서 현상학으로,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등으로 확실히 전향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진영의 장점을 두루 취하겠다는 의미이기보다 세상이 역동적이기 때문에 두루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마태 수난곡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글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