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는 것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류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다. 단 차이가 있다. 내가 들을 때는 묻는 형식으로 말하고, 해설할 때는 확실히 익혀 명확히 이야기하되 사안에 따라 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대답(對答)하거나 강의(講義)할 때보다 질문(質問)하거나 수강(受講)할 때는 새롭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도 내가 염두에 두는 지침이다.

 

어제 수업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판교(判敎)는 교판(敎判)이라고도 한다는 강사의 말에 고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을 말하는 것이지요? 라고 물었다.

 

일본의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교상판석의 변천을 말한 바 있다. 남북조 시대의 교상판석은 석존(釋尊)의 설법인 모든 경전을 모순되지 않도록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수, 당 이후에는 경전이나 철학서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학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으로 변모하여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어떤 종파보다 뛰어남을 논증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경전의 성립과 전개’ 131, 132 페이지)

 

내가 아는 정도는 대략 이 정도이다. 깊이 있게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바로 어제 지식이랄 것도 없는 내 말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다는 말을 교판 수업 후 들었다.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은 내가 밴드에 올린 글을 보고 글로도 아는 척을 하네.”라며 노골적인 불편감을 표했다고도 한다.

 

그 사람의 말이 결여한 것은 설득력이다. 그도 아는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는 척이 아니란 말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말하자 역정을 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認定) 욕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걸 모르는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란 작품에는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다. 되새길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 사람에게 결여된 것은 자존감이기도 하다. 내가 언급한 내용들이 뭐기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감을 표했을까? 나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 질투하지 않고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다만 나도 아는 척 하기 좋아함을 모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를 그렇게 설명한다. 세상 지식은 많고 아는 척 하는 즐거움은 크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란 의미를 지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라는 공자의 말처럼 열심히 배우고 익힌 것을 선의(善意)로 표현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상대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질투하지도 말고 덜 안다고 무시하지도 말며 교류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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