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도가 아닌 내가 과거 신앙 경험에 기대 인용하고 싶은 성경 구절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고린도 전서 1312)란 구절이다.

 

놀랍게도(?) 이 구절은 바울의 말이다. 놀랍다고 한 것은 바울은 기독 청년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 유명한 고린도 전서 사랑 장()의 하이라이트인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란 말 바로 앞 구절이기 때문이다.

 

12절과 13절 사이는 연결의 당위가 희박해 보인다. 지금과 달리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온전히 알 것이라는 구절 다음에 바로 그런즉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이 오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고 온전히 알 것이기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인가? 이해하기 어렵다.

 

각설하고 지금 나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어 답답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오래, 열심히 해오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조차 나는 희미하게 알고 있는 듯하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는 말을 좋아하지만 실천도 잘 못하고 지금껏 몇 수레의 책들을 읽었다기보다 힘들여 끌고 온 것만 같다. 오늘 산 한 중고책에서 저자가 누군가를 좀 더 알고 싶을 때 종종 그 사람이 기억하는 생애 첫 장면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글을 읽었다.

 

저자는 자신의 첫 기억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가? 불확실하다. 그러니 현재도 희미하고 과거도 희미한 것이다. 다만 초등학교 저학년때 삼국지의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구절을 맞춰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기억은 편하면 아무곳에나 드러눕는 개 같다는 말이 있고 인간은 편집된 기억의 산물이라는 말도 있다. 좋은 책을 많이 읽자. ‘를 충실히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첫 기억이 늦다는 것은 기억의 총량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독서로 양질의 기억거리를 많이 만들기이다.

 

그런 생각에 오늘 책 다섯 권을 샀다. 언젠가 필요할 것이란 믿음에 근거해. 지금은 서재 한편을 차지할 뿐이지만 언젠가 정식으로 그 책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펼쳐보나 언젠가 온전히 펼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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