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상 시인의 집(종로구 통인동)이 재개관되었다. 이상 시인이 1912년에서 1933년까지 거주한 곳이다. 이 집은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으로 지킨 건물이다.(원래 이상 시인의 큰아버지 집인데 이상 시인이 양자로 들어가 산 곳이다.)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전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 시민 소유로 영구 보전하고 관리하는 운동을 뜻한다.(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이사는 건축가 김원이다. 러시아 대사관을 설계한 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본명이 김해경인 이상 시인의 '()'은 상자 상이란 글자이다. 알려지기로 서양화가인 친구 구본웅이 사생 상자(寫生 箱子: 스케치 박스)를 선물하자 상()에 들어 있는 나무<>이 들어 있는 성씨들 중 이씨를 택하고 상() 그대로를 취해 이상이란 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 철학자가 김해경이 자신의 필명을 이상으로 한 것은 각자의 직업에 붙들려 왜소해져가는 근대적 인간에 대한 풍자의 의미가 있다는 말을 했다. 이 철학자에 의하면 이상은 상자 속에 갇힌 인간을 부채꼴 인간이라 부르기도 했다.(부채꼴이란 원의 일부이니 상자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다.)

 

부채꼴 인간이란 부분적 인간이다. 전문성을 얻는 대신 전인성을 상실한 근대적 인간을 의미한다.('분류와 합류' 5, 6 페이지) 사생 상자를 선물 받고 상이란 글자로 필명을 삼았다는 이야기는 재기 있지만 깊이가 없다. 상자 속에 갇힌 인간 또는 학문에 대한 풍자는 당연히 의미롭다.

 

어떤 것이 맞든 상관 없다. 다만 재기보다 의미를 염두에 두고 상자를 취한 데에 이상 시인의 풍자적 무의식이 관련된 것은 아닌가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알려졌듯 앞에서 말한 철학자는 김상환 교수다. "...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척도와/ 사물의 우매함과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로 끝나는 김수영 시인의 '공자의 생활난'에서 나는 죽을 것이다란 구절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씀과 연결지어 풀이했고 풀이 눕는다는 구절이 인상적인 '', 태극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론적 질서가 무극에 의해 주도되는 시적인 질서로 반전되는 사건을 노래한 시로 풀이한 철학자다.(김상환 지음 '공자의 생활난' 참고)

 

시를 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시의 자연스러움을 해치는 행위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런 점은 내가 걱정할 사안이 아닌 바 설득력 있는 점을 취하면 되리라. 아무래도 깊이보다 넓이를 지향하는 나는 흔쾌히 김상환 철학자의 해석에 표를 던진다. 관건은 깊이도 충분히 추구하며 넓이를 지향하는 것이다.

 

상자 인에 갇히지 않되(상자 속에서 나오되) 광장 이곳 저곳에 어느 정도는 충분한 깊이의 흔적을 남겨야 하리라. 상자를 밀실로 바꾸면 바로 '광장'의 최인훈(1936 - 2018) 작가가 생각난다.

 

'광장',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회색인'도 언제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시간이 없어서 아니 없으면 읽고 싶고 여유로우면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를 찾는 ''가 문제다. 이렇게 시간이 간다. 그래도 기우뚱한 채 균형을 찾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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