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 케이스 - 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
이해영 지음 / 삼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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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인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 이는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 케이스에서 제시한 핵심 주장이다.

 

현 안익태의 애국가에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묻는 것이다. 그간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만든 건 1935년경이다. 그 후 2년여 만인 1937년 안익태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1938년 안익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를 초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에 의하면 당시 안익태의 애국가는 같은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빌려온 애국가 등 여러 애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열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도 안익태 작곡이 아닌 올드 랭 사인곡조의 애국가였다. ’애국가가 문제인 것은 단지 친일 부역자가 지은 곡이어서가 아니라 만주국 건국 10주년(1942)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해 만든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

 

잘 알고 있듯 만주국은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이다. 안익태 즉 에키타이 안은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며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악보를 폐기한 데 이어 현재 악보와 음원이 전해지지 않는 1938년 더블린 판 코리아 판타지를 개작해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으로 만들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꾀한 변신의 일환이다. 자작 애국가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애국으로 포장하면서 1938년부터 1944년에 이르는 친일 행적을 숨긴 것이다.

 

1965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떠난 안익태의 시신은 현재 국립 현충원에 묻혀 있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정계와 문화계 인사 등이 주도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물론 그에게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올랐다.

 

안익태는 더블린에서의 코리아 판타지초연 이후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머물렀다. 이해영 교수는 미 육군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문건인 ‘2차대전 기간 전시 독일의 외교 및 군사 정보 활동 보고서를 참고, 에하라 고이치가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에키타이 안을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1959년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고 주장한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안익태가 친일부역행위를 했다 해도 애국가를 만들 당시엔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해영 교수는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선 그 곡을 만든 이의 전 생애를 판단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흠결 없는 삶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양 출신의 안익태가 일본에 유학할 때 사용한 이름은 안에키타이(あんえきたい)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할 때는 에키타이 안(Eak-tai Ahn)이었다.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正則) 중학교를 거쳐 도쿄 구니다치(國立) 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안익태가 미국에서 유학한 뒤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1937년이었다.

 

19382월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으로 후에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진 자작곡 '교향적 환상곡 조선의 초연을 지휘했다. 같은 해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를 발표했다. 1959년 이 작품은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19437월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정식 회원(회원번호 RKK A 115.)이 되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나치 시절 괴벨스가 주도한 '음악가 조직인 제국음악원에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교관으로 포장한 베를린 지역의 첩보 총책' 에하라(江原)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프랑스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스페인으로 피신, 활동하던 그는 종전 뒤인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다. 안익태는 19553'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 지휘차 귀국했고 4월에는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는 5년 뒤 이승만의 '탄신 85회 음악회' 지휘를 위해 다시 귀국한 바 있다. 1962년에는 박정희를 예방,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

 

1930년 조국을 떠난 안익태는 25년 동안 고국을 찾지 않았고 굳이 일본 국적을 가질 일도 없었고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며 일제에 협력할 필요도 없었지만 일제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었고 에하라(江原)의 지원을 받아 유럽 무대에서 지위를 굳혔다.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봉사한 것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다. "'국가'는 한 나라의 상징"인데 "법으로 공인된 '국가'가 아님에도 그냥 관습적으로 불러왔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란 물음을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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