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7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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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기본 입자를 뜻하는 쿼크(quark)라는 용어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의 주요 개념은 문학작품에서 기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쿼크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서 비롯된 용어라면 자연선택에 대한 대중의 그릇된 인식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장시 ’In Memoriam‘에서 비롯되었다. 테니슨은 이 장시에서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자연이라는 표현을 썼고 그로부터 9년 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닉 레인(Nick Lane)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테니슨의 황량한 시각은 훗날 자연선택에 대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그 표현은 모든 생명의 관계를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생생한 싸움으로 단순화시켰고 다윈이 일반적인 생존경쟁을 더욱 선호한 것처럼 여겨지게 했고 개체와 종 사이의 협동과 한 개체 안의 유전자들의 협동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했고 공생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했다.(’생명의 도약‘ 239, 240 페이지)

 

하나의 잘못된 시초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를 우리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의 생성과 유통 과정을 통해 알게 된다. 존 캐서디는 최근 나온 시장의 배반에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 의하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것은 단 한번이고 그나마 얼버무리는 식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체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단 한번 얼버무리는 식으로 언급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 수백년 동안 주류 경제학의 모토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 ~ 1921)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읽으며 다시 한번 잘못된 기원 또는 인식의 오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크로포트킨을 무정부주의자로만 간주하는 것은 일면적 인식에 불과하다. 귀족 출신 장군의 아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사상을 지녔던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를 목격한 뒤 갖게 된 혐오감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는 꿈을 꾸었다.

 

크로포트킨은 1888년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1825 ~ 1895)의 논문에 자극받아 만물은 서로 돕는다(Mutual Aid)'라는 불후의 책을 썼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은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헉슬리에 맞서 인간은 원래 선하고 자비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또는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는 사상을 천명했다.(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헉슬리는 다윈의 핵심적인 사상보다 용어 몇 개를 가져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에 과학적인 외피를 입힌 사람이다.)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에서 다윈의 생각에 의심을 품게 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동물들이 자연의 힘 앞에 혹독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한편 수많은 개체들, 군체들 사이에서는 어김없이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게 그 모습은 생명의 유지와 종의 보존, 나아가 종의 진화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느껴졌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를 입중해주는 사례들이 너무나도 풍부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크로포트킨의 주요 논지는 인간의 삶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상호 도움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했다. 동물 세계의 개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인간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동물들 사이에서 격렬한 경쟁의 시기에는 종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착안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 야만인, 미개인, 중세의 도시인, 근대인등이 보인 다양한 상호 부조 사례를 예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크로포트킨은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면서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들이야말로 늘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예들은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발견되었다고 크로포트킨은 주장한다.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들이 전성기를 누리는 시기야말로 예술, 산업 그리고 과학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개미와 흰 개미는 홉스주의적 전쟁을 포기했다는 말을 했다. 이는 인간이 진화의 정점(定點)이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생물학자들을 중심으로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낯설거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진화과정이 고등한 형태가 오래된 원시적 형태를 단지 대체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고도로 진화한 종족 즉 몇몇 영장류만이 현존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반면 물리학자 한스 그라스만은, 진화는 발달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경험상 명백한 모순에 빠진다는 말을 했다. 내 경우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진화를 보는 시각은 하나로 고정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리프킨은 이 책에서 진화로 인해 에너지 흐름의 값이 더욱 커지고 이로 인해 환경 전체에 더 큰 무질서가 발생한다는 점을 예로 들어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한스 그라스만이 말한 진보는 지력(知力), 언어 능력, 도구 사용 능력 등의 면에서 정점(定點)에 오른 인간의 위상을 말하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리프킨의 말은 더 큰 무질서(더 큰 엔트로피 총량)에 착안(着眼)한 말이다. 자연에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을 가하며 유용한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현재의 행태는 진보와 발전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루소가 자연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했다면 헉슬리는 투쟁만을 보았다는 이유로 양자를 모두 비판하며 서로 도움을 주는 종이 싸움만 하는 종에 비해 적자(適者)라고 주장하는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저작에서 경쟁에 대한 실제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다윈이 극심한 생존 경쟁을 주장한 것은 중간 변종의 절멸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따라서 절멸이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중간 형태의 절멸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은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는 주장을 펴며 인간들이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에서 예외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상호 부조가 지배적인 세계로 보았음에도 그 법칙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정글로 보고 있기에 인간만이 자연 법칙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남으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지적해야겠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는 홉스는 다윈의 직계 조상이라는 주장을 폈다. 홉스는 데이비드 흄을, 흄은 애덤 스미스를, 애덤 스미스는 맬서스를, 맬서스는 다윈을 낳았다.(‘이타적 유전자‘ 347 페이지) 한편 스미스는 밀턴 프리드먼을 낳았고(경제학), 다윈은 도킨스를 낳았다.(생물학) 리들리는 헉슬리의 능력주의에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그 잔혹한 우생학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을 한다.(리들리는 주목할 만한 생물학 이론가이다. 붉은 여왕 이론과 별개로 히틀러의 우생학은 다윈이나 스펜서가 아닌 마르크스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새롭고 논쟁적이다. 다윈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저작에 그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리들리는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본능은 북돋고 자기이익과 반사회적 행동을 추구하는 본능은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기적(또는 이타적)이라는 선언이 사람들을 그렇게(이기적 또는 이타적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전제하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간에게는 사리(私利) 추구를 향해 치닫는 천성이 있다는 진실을 숨기거나,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에는 고상한 야만인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리들리는 침팬지와 달리 남녀 평등, 평화와 배려 등의 특징을 보이는 보노보가 우리에게 조금 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을 것(‘내 안의 유인원을 쓴 프란스 드 발 교수)이라는 보노보를 둘러싼 이슈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노보에 비해 폭력적인 침팬지가 인간 본성의 모델로 결정되었기에 인간들이 폭력적이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니듯 평화와 배려를 특징으로 하는 보노보가 인간 본성의 모델이 된다고 해서 인간들이 평화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특성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지만 이타적 유전자를 말하는 리들리의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희망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세계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의 정의(定議)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상생을 위한 길은 멀어 보인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닉 레인의 책(‘미토콘드리아생명의 도약‘)과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을 정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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