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 - 처음으로 읽는 조선 궁중음악 이야기
송지원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자(孔子)가 순() 임금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음악의 일종인 소()를 듣고 석 달동안 음식 맛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박지원의 열하일기 '망양록(忘羊錄)'에 의하면 박지원은 귀한 손님이 오신다기에 양 한 마리를 통째 쪄 준비해 놓고 그 손님과 진지하고도 재미 있는 음악 이야기를 하느라 양을 쪄놓은 사실을 잊었다고 한다.

 

송지원 교수는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에서 박지원이 그럴 정도로 나눈 이야기는 조선과 중국의 음악 이야기였다고 말한다. 제목에 나오는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조선 성종대에는 1000여명의 음악인들이 장악원에 속해 음악을 연주했다. 조선시대에 왕실 행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장악원 음악인들이 있었다. 조선의 악()은 예()와 함께 의례의 핵심이었다. 장악원은 숭정원, 사간원, 홍문원,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과 함께 정3품 관청이었다.

 

1년 중 장악원이 가장 많이 출연하는 행사는 제사 의례이다. 장악원의 최고 책임자는 제조(提調)였다. 당상관 두 명이 맡았는데 전문 음악인이 아니라 행정관리였다. 이는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정보의 총책임자를 맡았던 것과 맥락이 같다.(어의들은 진맥 외의 방법으로 임금의 몸을 진찰할 수 없었다.)

 

성리학은 조선 시대의 여성 음악인들을 남성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 출현하지 못하게 했다. 인조반정 이후의 일이다. 본문에는 차비(差備)란 말이 나온다. 자비(自備) 또는 척()의 의미이고 우리 말로 잡이라 한다. 장구 잡이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조대의 화원을 자비대령화원이라 했다. 한문으로는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썼다. 정조는 귀가 밝았다.

 

세종, 세조처럼 정조는 장악원 음악인들의 연주를 다그쳤다. 특히 정조는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음악의 선율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사직제에서 연주되는 제례악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음악을 소홀히 연주하는 것을 지적하고 엄히 다스렸다. 정조는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온 굴씨(屈氏) 또는 굴저(屈姐)라는 궁녀가 있었다. 명나라가 쓰러져 갈 무렵 숭정제 황후의 궁녀로 일하던 여자였다. 숭정 말년에 이자성이 황도를 함락시키자 황제와 황후가 자살했다.

 

굴씨는 민간으로 몸을 피했으나 청나라 군사에 발각되었다. 청의 실권자였듼 예친왕 다르곤은 굴씨를 심양에 볼모로 있었던 소현세자에게 넘겼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조선에 들어온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굴씨는 비파를 잘 타 장악원 소속 음악인들에게 비파를 가르쳤다.

 

이때는 조선이 전란 후유증으로 종묘/ 사직 제례악도 연주하지 못하던 때였다. 음악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굴씨는 70세까지 살다가 숙종대에 생을 마감했다. 조선은 예악정치를 구현했다. 예는 인간의 차별적 질서를 강조했고 악은 인간의 조화와 공존을 강조했다. 종묘제례시의 춤은 제후국의 위격인 육일무였다. 일수 6, 열수 6으로 36명이 추는 춤이란 말이 있고 일수 6, 열수 8 48명이 추는 춤이라는 말이 있다.

 

공자의 논어 '팔일(八佾)'편에 주자가 주석한 내용에 본인도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른다는 글이 있다. 조선 전기는 48, 중기, 후기는 36명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묘 제례는 조상(선왕)의 혼을 만나는 기쁜 의례 즉 길례(吉禮)이다. 장례는 흉례(凶禮)이다. 이때는 진이부작(陳而不作)했다. 악대는 진설(陳設)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3년 동안 연주를 하지 않으면 제례악을 다시 연주할 때 어려움이 생기거나 새로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지므로 그런 것을 우려해 악생들의 연습은 허용했다. 궁중 연향에서 연행되는 춤을 정재(呈才)라 한다. 재주를 드리다, 재예를 올리다란 뜻이다.

 

조선은 무너진 예를 악으로 일으키려 했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은 <세종실록> '오례'로 국가례의 기틀을 마련했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의>로 전모를 정리했다. 맹사성은 악인이기도 했다. 장악원의 전신인 관습도감의 제조로서 맹사성의 업적은 눈부셨다. 조선 초기 궁중 음악은 그로부터 정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맹사성은 세종대의 박연과 함께 지악지신(知樂之臣) 즉 악을 잘 아는 신하로 불렸다. 박연은 세종의 뛰어난 음악 비서였다. 성종대의 장악원 제조였던 성현을 빼놓을 수 없다. 성현은 '악학궤범'의 저자이다.

 

김용겸(金用謙)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의 기대주였다. 김용겸은 악서인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읽었느냐는 정조의 물음에 그 책을 보았고 종과 석경 소리를 들으면 높고 낮음 정도는 분별할 수 있다고 답했다.

 

예와 악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 정조는 음률과 예학에 두루 깊은 인재 김용겸을 장악원 제조로 임명했다. 김용겸은 박지원, 홍대용, 이서구, 정철조 같은 연암 그룹 구성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정조 대의 학자 출신 관료들은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음악 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정조가 집권 초반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아악기인 종, , , 슬을 규장각에 하사한 것은 악을 중시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예와 악을 함께 갖추기 위한 정조의 노력 덕에 정조 시대는 문화융성기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정조 자신의 음악 실력과 무관하지 않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생부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사도세자를 모셨던 수은묘를 경모궁(오늘날 서울대 의대 자리)으로 승격시켰다. 경모궁의 제례를 정하고 경모궁제례악도 만들었다. 고종황제가 장헌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며 경모궁의 신주를 종묘로 옮긴 이후부터 경모궁 제례는 열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풍류를 아는 선비들은 누구나 왠만큼 거문고를 연주했다. 옛 선비들은 거문고를 삿된 마음을 금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 거문고는 단순히 악기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거문고 음악이 예술성을 추구하거나 기교를 자랑하는 음악으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두 줄의 악기이지만 표현 영역은 거의 무한대인 해금은 현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관악기 중심인 음악에도 두루<> 어울려 비사비죽(非絲非竹)의 악기 즉 현악기도 아니고 관악기도 아닌 악기로 불렸다.(비사비죽은 18세기 유명 해금 악사 유우춘의 표현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현악기는 현을 뜯거나 튕기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음이 끊어지지만 해금은 줄을 마찰시키는 한 계속 소리가 나기에 관악기로도 볼 여지가 있어 관악기이면서 현악기라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 하다고 말한다.

 

예전에 왕이 죽으면 명기(明器) 악기라 해서 소형 악기를 만들어 왕의 무덤에 묻었다. 조선 전기부터 경종의 무덤까지 아쟁을 묻었는데 정조대 이후에는 아악기만을 묻었다. 비파(批把)라는 이름은 악기 연주법에서 유래했다. 손을 앞으로 내밀어 타는 것을 비, 안으로 끌어 당기며 연주하는 것을 파라 한다. 오늘날 비파는 비파(琵琶)로 쓴다.

 

맹사성, 박연, 정약대, 김계선 등이 대금의 명인이었다. 특히 정약대는 '정약대의 대금'(조용미 시인의 시)이란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마지막 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청아하고 신묘하고 장쾌한 소리를 향해 대금을 지고/ 사막을 건너야 할 운명을 火印처럼 몸에 새기고 태어난/ 사람, 그의 귀는 10리 밖에서도 대금 소리를 잡아냈을까// 정약대는 낙타였다"

 

저자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옛 조상들은 예()와 악()을 함께 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무너진 예를 악으로 바로 세우려 했다. 늘 연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장악원 악인들을 통해 연습의 의미를 음미하게 된다. 특히 의례와 음악의 조화를 중시했던 정조를 다시 보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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