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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과학, 천문학 ㅣ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22
박창범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지전설(地轉說)은 김석문(金錫文: 1658 - 1735)이 처음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홍대용(洪大容: 1731 – 1783)이 수용했다. 나는 지난 번 해설에서 홍대용 이야기를 하며 점성술에 가까운 천문과 수리천문학에 가까운 역(曆)으로 구성된 조선 천문학('조선 전문가의 일생' 49, 50 페이지)은 홍대용이 공부한 천문학과 다르다는 말을 했다.
정성희는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지전설이라기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설이라 설명하며 그의 우주관을 과학사적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싶다고 말한다.('우리 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99, 100 페이지) 이유인즉 홍대용이 말하려던 바가 우주론 자체가 아니라 탈중화적 세계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읽을 책이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의 '한국의 전통 과학 천문학'이다. 박 교수는 고대의 천문 활동을 현대 천문학과 무관하게 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다고 말한다.(13 페이지) 저자는 고인돌의 남동쪽 방향을 천문학적 고려의 결과로 보며(25 페이지) 거석문화를 자생 천문학의 출발로 결론 짓는다.(31 페이지)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은 도교적 사상과 상통한다.(39 페이지) 중국 한나라 시대에 성립된 도교는 점성술적 믿음을 담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면의 별자리 배치 순서는 하늘의 북극과 적도를 기준 방향으로 해 천체의 위도를 나타냈고 천체의 경도는 추분점을 기준으로 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재어나갔다. 이는 현대 천문학이 채택한 적도 좌표계와 완벽하게 같다.
고구려 덕화리 2호분의 북쪽 벽에는 북두칠성이 그려졌고 남쪽 벽에는 남두육성이 그려졌다. 천정에는 중국식 별자리인 28수(宿)가 그러졌다.(41 페이지) 인정(人定)시에 치는 28번의 종은 이 수에서 나온 것인 듯 하다. 28수는 하늘에서 달이 지나는 길을 따라 만든 개념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특징은 정확한 별의 밝기 구별이다. 삼국사기에 태백범월, 태백입월, 태백주현이란 말이 나온다. 태백범월(太白犯月)은 태백성으로 불리던 금성이 달에 근접한 현상을 의미한다. 태백입월(太白入月)은 금성이 달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태백주현(太白晝見)은 낮에 금성을 보았다는 의미이다.
첨성대는 몸통은 원으로, 머리는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당시의 우주 구조론인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했다. 천문 현상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천체의 주기적 운동을 파악하게 된다. 천체 중 단연 두드러지게 주기성에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해와 달이다.
해는 매일 뜨고 지며 하루를 바꾸고 달은 찼다 이지러지며 한 달을 바꾼다. 하루와 한 달이라는 주기를 한 해 안에 큰 무리 없이 짜넣으려는 노력이 달력 제작이고 역법(曆法)의 본질이다.(69 페이지)
우리나라에서 천문 현상 기록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삼국시대의 20배이고 조선시대에 비해 종류와 시대 분포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81 페이지) '고려사'에는 일식 예측을 어긋나게 한 일관(日官)이 사형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에는 태양 흑점을 흑자(黑子), 오로라를 적기(赤氣)로 표현했다.
오로라는 태양 활동 때 방출되는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 대기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대기 입자와 부딪혀 빛을 내는 현상이다. 고려 시대의 흑점과 오로라 관측 기술이 큰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 기록들이 태양 활동의 11년 주기를 분명히 나타내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송, 금, 원나라의 기록은 주기성이 없다.(92 페이지)
고려의 천문 관측대나 고군벽화 별 그림 등은 고려의 활발한 천문 관측 활동을 증거하는 실존 유물이다.(99 페이지) 세종 시대는 우리 천문학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때이다.(107 페이지) 세종은 이슬람 과학으로 계승된 서방의 과학과 동아시아 전통 과학을 적극 선별, 흡수해 15세기 초엽 동아시아 동쪽 끝에서 용융시킴으로써 천문의기, 관측, 역법 분야를 아우르는 세계 최고의 천문학을 일으켰다.(108 페이지)
그러나 그 시기의 수많은 정교한 천문기기와 서적 등이 두 차례의 왜란으로 모두 망실되었다. 소실된 관천의상의 복원은 선조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200년의 세월에 걸쳐 일어났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중국을 통해 서양 천문학이 전래됨으로써 힘겹게 복구한 전통 천문학은 효용을 잃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일성록, 증보문헌비고 등에 방대한 천문 현상 관측 기록이 있다. 전통 시대 기록 중 객성(客星)은 별은 아니고 혜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체 불명의 천체라 할 수 있다.(114 페이지) 객성 가운데 케플러 초신성 관측 기록도 있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만든 천문도가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제작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희귀 과학 유물이다. 별들의 밝기가 서로 다르게 그려진 것이 큰 특징이다. 별들의 밝기가 서로 다르게 그려진 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 별 그림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7세기에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최초의 천문도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서양 천문학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인조 9년(1631년)이다. 혼천의는 혼의, 선기옥형(璿璣玉衡) 등으로 불렸다. 세종 시대에 만든 간의(簡儀)는 혼천의보다 간단한 천체 측정 기구이다.(134 페이지)
앙부일구를 제작하려면 관측지의 북극 고도 또는 위도를 알아야 한다.(136 페이지) 조선은 건국년인 태조 1년(1392년)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운관(書雲觀)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해 천문 관측을 전담하도록 했다.(142 페이지) 실록에 의하면 서운관은 재이(災異)와 길조를 관측하고 책력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1467년 서운관은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를 맡았다. 조선은 유일신이 우주를 주재한다는 믿음이 강했던 서양과 달리 종교적 반발감 없이 새 우주 모형을 탐닉하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149 페이지) 김석문은 지전설을 정설로 서술한 1767년의 베노이스트의 '지구도설'보다 먼저 지전설을 주장했다.
김석문의 지전설은 이익, 홍대용 등에게 이어졌다. 홍대용은 나경적(羅景績, 1690~1762)에 의뢰해 사설 천문대를 짓고 혼천의, 혼상, 자명종 등을 설치했다.(153 페이지) 훈민정음의 기본 획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원래의 28자는 28수 별자리에 맞추기 위해서 만든 숫자로 보인다.(158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