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김준혁 지음 / 여유당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유산 수원 화성(華城: 1997년 지정)을 무엇이라 부를까? 과학성과 합리성, 실용성 등을 두루 갖춘 동양 성곽의 백미? 강한 군사력에 근거, 왕도정치에 한 몫을 한 상징 건축물? 한신대학교 정조(正租) 교양대학 김준혁 교수의 이산 정조, 꿈의 도시 수원 화성을 세우다를 통해 바로 그 수원 화성의 정신과 물질적 토대를 알아보자.

 

무엇보다 먼저 말할 것은 1796년 축성(築城)된 수원 화성은 18세기 개혁 군주인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었다는 말이다.(340 페이지) 정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은 수원 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힘이었고 정조는 바로 그 힘을 반대세력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점은 화성이 성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성은 도시 전체를 의미한다.(17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정조는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세우고 그 중심에 화성(華城)을 축조(築造)했다. 개혁을 주도할 선진적 인물과 도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화성 축조의 배경은 무엇일까?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개인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노론이라는 반대 세력의 정치적 행보가 작용한 결과다. 사도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던 경종 궁녀들의 보필(輔弼)을 받으며 자랐다. 영조의 탕평책의 일환이었지만 이로 인해 사도 세자는 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노론 신하들의 잘잘못을 거론하는 등 소론의 시각으로 정세를 보았다.

 

자연히 이는 영조 및 노론 세력과의 갈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지적이 이 책의 주요 성과이다. 물론 영조의 과오는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환원할 수 없다. 개인적인 과오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화성 성역은 1804년 정조의 양위 이후를 대비한 터전(303 페이지)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화성은 주인을 잃었다. 정조는 개혁과 호학(好學)의 군주였고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의 군주였다.

 

또한 만기친람(萬機親覽: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보살핌)의 군주였고 남다른 효심을 가진 군주였다. 정조는 서얼 허통과 자휼전칙을 시행했고 노비제도 혁파안을 통과시키려 했고 신분에 관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정치색이 달라도 쓸모가 있으면 적재적소에 등용했다.(350 페이지) 둔전(屯田)을 운영하도록 했고 대규모 국영 농장을 만들었다.(144 페이지) 더욱 그는 수원을 국제 무역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147 페이지) 이렇듯 정조의 개혁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185 페이지)

 

정조는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은 물론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었다. 문무(文武)를 겸한 정조의 전일성(全一性)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는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268 페이지) 화성 행궁의 정문 이름을 신풍루(新豐樓)로 지은 데서 알 수 있듯 정조는 수원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선언했다. 풍이란 말은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灃沛)에서 유래해 황제의 고향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305 페이지)

 

정조는 고도의 정치 역량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와 관련한 언급을 일정 선에서 그침으로써 노론으로 하여금 화성 축성과 관련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212 페이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 화성은 정조의 모든 역량이 총동원된 작품이자 정조 자신을 가리키는 건축물이다.

 

정조에 대해 한 논자(백승종)는 정조가 조선 왕조의 오랜 국시(國是)인 성리학의 함양을 부르짖었다는 이유로 정조가 개혁 군주로 불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정조와 불량 선비 강이천‘ 346 페이지) 정조가 취한 물적 토대에 기반한 수많은 개혁의 시도들은 도외시하고 성리학이라는 학문만을 고려한 편중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정신에 대해서는 성리학을, 정신 이외의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실학 정신을 인정, 적용했다. “화홍문(華虹門)은 실학 정신을 실현한 평등 정신의 산물”(260 페이지)이란 말을 새기자. 정세에 대처하고 백성들에 대해 보인 정조의 태도에 실학 정신이 깃들지 않은 것이 있는가, 묻게 된다 .

 

화성 완공 1년 전 어머니 회갑을 치르기 위하기 위해 나선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 완공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자세히 보아야 하겠고 정조의 철학적 면모에도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 내가 정조를 좋아하는 것은 전기한 여러 면모들 외에 정조가 주역과 풍수 등에 능통해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하게,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상곡(夜想曲) 2018-10-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그래봤자 조선은 이미 패망의 길로 갈수빢에는 없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력과 외교력을 따라가기엔 조선은 이미 늦어도 한참을 늦었다(임진왜란때 조선은 그냥 패망했어야 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10-03 19:03   좋아요 0 | URL
역사 추리 조선사 리뷰를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야상곡(夜想曲) 2018-10-03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는 조선의 두얼굴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