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대의 양성지가 처음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숙종대에 이르러 왕실의 종친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종부시(宗簿寺)에 별도의 건물로 지어진 규장각(奎章閣)이 영조대에 화재로 소실되자 창덕궁 후원에 새롭게 지으라고 명한 정조.

그는 규장각을 학술 연구기관이자 정치 개혁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만들어 갔다. 정약용, 서유구 등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선발된 젊은 학자들이 정조의 개혁정치를 학습하였는데 이들이 공부하고 연구한 곳이 바로 규장각이다.

그런데 규장각을 학문을 장려하고, 그에 바탕해 개혁 정치를 구상한 정조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으로 본 한 사학자가 이런 글을 썼다.

˝초계문신 제도는 1781년에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총 138명을 뽑았다.˝

의도를 알겠지만 어색한 문장이다. 초계문신 제도에 의해 누구 누구를 비롯 138명이 선발되었다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 중문학자는 역시 규장각을 논한 글에서 ˝그래서 1776년 3월 10일 경희궁의 숭정문에 즉위한 이튿날...˝이란 글을 썼다.

사소한 것 같지만 ˝숭정문에서 즉위한...˝이라고 해야 자연스럽다.(내 사소한, 그리고 주관적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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