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장면 전 총리 가옥 앞의 빈빈책방에 이르자 우리 답사팀원들보다 많은 분들로 구성된 다른 답사팀원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팀원들에게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의미를 설명했다. 문질빈빈의 줄임 말로 내면과 외양이 조화를 이룸을 뜻하는 빈빈은 공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공자는 바탕인 질(質)이 표현인 문(文)을 능가하면 촌스럽고 그 반대는 공허하다고 말했다. 공자는 또한 자신에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역(易)에 있어서야 문질(文質)을 겸비하리라는 말을 했다.
빈빈책방은 출판사라는 말까지 했다. 우리 팀원들보다 먼저 도열해 있던 그들은 내 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번 연산군 묘에서는 다른 팀원들이 내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역에 있어서야 문질을 겸비하리라는 말은 가죽으로 묶은 책이 세번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애독했다는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일화에서 위(韋)가 가로로 묶은 끈을 의미하는 위(緯)라는 주장을 한 도미야 이타루의 '목간과 죽간으로 보는 중국 고대 문화사'에서 덤(?)으로 읽은 내용이다.
위편삼절을 전통대로 가죽으로 묶은 책이 세번 끊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싶다. 내 설명을 들은 누군가가 위편삼절은 가죽이 아니라 가로로 묶은 일반 끈이 세번 끊어진 것이라 보아야 타당하지 않은가요 묻는다면 좋겠다.
그러면 네, 중국의 임소안(林小安)이란 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고 일본의 도미야 이타루가 임소안의 설을 수용하면 가죽을 생각할 필요 없이 깔끔한 해석이 가능해진다는 말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위(緯)란 글자는 날줄, 씨줄에서의 씨줄을 의미하고 경도, 위도에서 위도를 의미한다. 위(緯)에 대한 진술은 백소영 교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에서 읽은 경(經)에 대한 진술과 함께 최근 접한 흥미로운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백소영 교수에 의하면 경전의 경(經)은 실을 세로로 고정해놓고 하는 베짜기 작업을 의미한다. 즉 성경이란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신의 말씀을 경줄(날줄; 세로줄; 중심축) 삼아 자신들의 삶과 언어로 위줄(씨줄; 가로줄) 짜기를 해놓은 텍스트라는 것이다.
베짜기의 은유가 마음에 든다. 구약의 전투하는 만군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약의 베짜는 평화의 하나님을 수용하는 홍정수 교수의 '베짜는 하나님'도 그렇고 백소영 교수가 언급한 경줄과 날줄의 교직(交織)도 그렇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에서도 책쓰기에서도 선행하는 자료들은 경줄(날줄)이고 자신의 새로운 관점이나 자신만의 이야기는 씨줄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