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세계 예술 마을로 떠나다‘ 저자를 만나 물었다. 어떻게 1년 반의 시간을 여행을 할 수 있었냐고.
저자는 영국 유학을 위해 돈을 모았는데 연 4000만원의 학비를 보고 자신이 과연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인지 회의했고 그 결과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하게 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머지 않은 미래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저자에게 가시면 꽤 허전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예술 마을은 어떤 곳들일까? 오래 전 한 도예가의 이야기를 담은 강석경 작가의 장편 소설 ‘가까운 골짜기‘를 읽으며 막연히 예술에 대한 동경을 키웠었다.
예술, 하면 장인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산속 깊은 곳에서 죽염을 굽는 사람들에게서도 장인정신을 느낀다. 지나친 것일까?
베르그손은 ˝그림이건 조각이건 시이건 음악이건 예술은 실질적으로 유용한 기호, 관습적으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일반성 즉 현실 그 자체와 우리가 대면할 수 있도록 현실을 가리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다.(최영주 엮음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2‘ 27 페이지)
백상현 정신분석가는 예술가들을 유령을 소환하는 무당으로 정의하며 그들이 화폭 위로 불러낸 유령들은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의 매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상자에게 일깨우며 기존의 세계 질서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보수적 욕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21 페이지)
여기서 말하는 유령이란 ˝존재들의 있음의 질서 속에서는 출현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그와 같은 존재 질서의 일관된 흐름이 멈추는 지점에서 출현하게 되는 현상˝이다.(같은 책 1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베르그손이나 백상현 정신분석가가 예로 든 ‘새롭고 낯선 세계가 드러난 미술 작품‘을 내 힘으로 찾는 것일 테다.
박혜영 교수는 존 버거가 자연과 예술이라는 두 렌즈를 갈고 닦아 명징하게 보고자 한 것은 희망과 절망이라는 날실과 씨실로 짜여진 현실이라는 말을 한다.(‘느낌의 0도‘ 153 페이지; 이 렌즈의 비유는 존 버거가 존경한 스피노자 즉 안경 렌즈 가는 일로 생계를 꾸린 스피노자의 일화에서 얻어온 것이다.)
나도 렌즈를 갈고 닦아야 하겠다. 시라는 렌즈, 정신분석이라는 렌즈, 철학이라는 렌즈. 도나 노비스 파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