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시간의 한국사 여행 2 - 성리학에 의한 성리학을 위한, 조선. 조선 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36시간의 한국사 여행 2
김정남 지음 / 노느매기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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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교사의 ‘36 시간의 한국사 여행은 세 권의 책에 각 12시간(챕터)씩의 한국사를 담은 책이다. 선사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다룬 1,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를 다룬 2, 개항 이후에서 현대 사회까지를 다룬 3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물의 두 번째 책은 성리학에 의한 성리학을 위한 조선이란 부제를 가졌다.

 

저자는 개념에 대한 이해, 나열식 설명이 아닌 당시 사료를 통해 시대상 파악, 논리적 이해 등의 원칙으로 역사를 배울 것을 제안한다. 책은 어떤 경우에 조() 또는 종()이 붙는 걸까? 두문불출이란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는? 등 질문의 연속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지녔다.

 

명분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많은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정도전이 민본주의를 내세운 것, 태종이 충령을 세자로 삼은 이유 중 하나가 효령이 한 모금도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이라는 점, 수양이 일으킨 계유정난의 정당성, 해가 떠오른다는 이유에서 궁궐 기준 동쪽을 종묘(宗廟)의 위치로 삼은 것,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빌미로(중립 외교를 타개한다는 이유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성리학적 당위, 북벌론, 예송 논쟁, 성리학의 이상 정치만이 실천해야 할 도리라고 믿은 사림(관학파는 성리학을 통해 조선의 통치 체제를 만들려고 했다.), 명나라를 칠 것이니 조선에게 길을 내달라는 일본의 요구 등..영조가 탕평책을 쓴 것도 성리학적 명분론에 근거해 펼쳐진 붕당 정치를 타개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교는 명분론의 몸통이라 할 수 있지만 검소와 근검절약의 삶을 산 양반(지배층)의 자세가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지 못하게 한 것은 유감이다.(134 페이지) 일장일단이 있다고 해야 하는가?

 

명분이란 분수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효도를 다하는 것 등이 명분이다.(187 페이지) 명분은 핑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명분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이런 명분론에 입각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후금(後金)을 배척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면서 광해군 때 형성된 비교적 좋은 관계를 끊어버렸다. 명분론은 서인 정권의 든든한 이데올로기였다.(188 페이지)

 

오랑캐에 항복하여 그들을 섬길 수 없다는 김상헌의 논리는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경망하게 큰소리를 쳐서 오랑캐의 노여움을 도발, 마침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묘와 사직에 제사 지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 허물이 클 것이라는 최명길의 논리보다 경직되어 있다.

도리나 당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명분을 고집하는 것은 강퍅(고집이 세다)해 보인다.

 

반면 한명회의 사위라는 이유로 선왕(예종)의 아들 제안대군, 친형 월산대군 등을 제치고 성종이 왕이 된 것은 명분에 반한다.

 

금속활자 기술과 인쇄술의 발달로 지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양반층이 학문을 익히게 되어 15세기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사림파가 새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것(70 페이지)은 주목된다. ()를 중시한 이황과 상대적으로 기()를 중시한 이이의 구분은 흥미롭다. 이는 현실 정치에 대한 논의와 연결된다. 이황은 양반 중심의 신분제 강화를 주장했고 이이는 현실적 개혁을 주장했다.(125, 126 페이지)

 

남명 조식이 실천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 이 주의(主意)는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것과 관계 있다.(128 페이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조선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터를 한반도로 제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흥미롭다.(164 페이지) 이는 조선이 더 큰 전쟁터가 되었다는 의미이다.(178 페이지)

 

정묘호란은 인조와 서인 정권의 친명배금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187 페이지) 조선은 청나라(후금)의 군신관계 요구로 인해 의견이 엇갈렸다. 주화(主和)와 척화(斥和)기 그것이다.(188 페이지) 척화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치욕을 당한다.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군사를 파견할 것을 조선에 요구했다.(193 페이지) 주화파의 최명길 역시 이 요구에는 응할 수 없었다. 정의왕후 윤씨의 입김에 의해 이혈(李娎)이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데도 한명회의 사위라는 이유로 임금(성종)이 된 것처럼 인조는 소현세자 사후 그의 맏아들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195 페이지)

 

수양(首陽)이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계유정난을 일으켰다면 숙종은 붕당 세력이 좌우하는 정치를 임금 중심의 정치로 바꾸기 위해 환국(換局) 정치를 했다. 전자는 구실일 뿐이고 후자는 설득력이 있다. 수양은 계유정난으로 조카 단종을 죽였고 숙종은 갑술환국으로 아내 장희빈을 죽였다.

 

숙종 시기를 거치면서 붕당 정치는 상대 당을 철저히 압살하는 일당 전제화로 진행되었다.(218 페이지) 탕평책을 주장한 사람은 숙종 말년의 박세채이다.(215, 216 페이지)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운 사람은 영조이다.(220 페이지)

 

영조의 탕평책은 완론(緩論)이고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峻論)이다.(226 페이지) 완론은 노론, 소론 중에서 중립적인 사람들을 기용한 것이고 준론은 각 붕당의 당론을 배제하기보다 어느 쪽 당론이 옳은지 엄격히 가린 것이다.(227 페이지)

 

정조 사후 펼쳐진 정치를 세도정치라 한다.(237 페이지) 물론 책은 정조의 정치가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한 것인지 여부에는 말하지 않는다. 대동법은 농민의 집에 부과하던 세금을 터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부과한 제도이다. 대동법은 지주들의 반발로 시작된 지 100년이 걸려서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261 페이지) 지주들은 대동법의 부담을 소작농에게 전가시켰다.(262 페이지)

 

조선 후기에 상공업 발달로 사상(私商: 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은 자유로운 상인들), 도고(都賈: 도시에서 특정 물품을 대량 취급하는 상인), 객주(客主: 장사꾼들을 맞이하는 주인). 여각(旅閣: 숙박업소) 등이 등장했다.(박지원의 허생전의 허생도 도고였다.)

 

영조와 정조는 수령(지방관)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향촌에서 수령권이 강해져야 붕당의 힘이 약화되고 탕평정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여겨서이다. 18세기 이후 향촌은 수령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이유로 세도 정치 시기 관권에 의한 삼정의 문란이 심해졌다.(284 페이지)

 

겸재(謙齋)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대표적인 것이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이다. 비 갠 인왕산의 빛깔 또는 모습<()>를 그린 그림이다.(: 갤 제) 이는 76세의 정선이 친구 이병연이 비가 개듯 병에서 일어나기를 바라고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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