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북촌 이야기 최준식 교수의 서울문화지 2
최준식 지음 / 주류성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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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식 교수(이화여대 한국학과)()북촌 이야기는 수업 시간에 행한 서울 시내 답사를 기초로 한 책이다. 저자는 북촌을 동과 서로 나누었다. 북촌의 광활함을 생각한 결과이다. 동북촌은 북촌을 가로지르는 북촌로를 중심으로 그 길에서 창덕궁까지의 지역을 말하고 서북촌은 북촌 한옥길이 있는 곳이다.

 

저자는 북촌에 많았던 고관대작의 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데 지금 대부분 그 집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지금 북촌 가옥들 중 고관대작이 살았던 집은 윤보선 고택, 백인제 가옥 정도이다. 북촌의 집들은 대부분 작다. 북촌의 작은 집들은 대개 정세권 선생이 지었다.

 

선생은 북촌 뿐 아니라 서촌, 익선동, 왕십리, 휘경동, 충정로, 창신동 등지에도 작은 개량 한옥들을 지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위생적이고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정세권 선생이 한 것은 큰 집들을 부순 뒤 대지를 잘게 나누어 작은 한옥을 지은 것이다. 구입자들의 경제 형편을 고려한 결과이다. 더구나 선생은 집 값을 연 단위나 월 단위로 분할해 받았다. 중요한 것은 선생이 옛 한옥을 그대로 베껴 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북촌의 한옥들은 거의 선생이 만든 한옥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서 북촌은 집을 소유한 외지인들 비율이 높다. 서울시나 시민단체가 한옥을 지키기 위한 정책을 편 것이 한옥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기에 외지인들이 한옥을 투자 수단으로 산 것이다. 물론 이런 부작용을 탓할 수 없다. 어떻든 한옥을 많이 지켰기 때문이다.

 

현대 사옥 앞의 관상감을 조선의 지구과학 연구소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저자는 이 관상감 관천대의 높이가 지상에서는 의미 있겠지만 하늘 차원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높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란 의문에 따라 그 옆에 텐트를 치고 1년 동안 별을 관측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라 말한 한 전문가를 언급한다.

 

현대 사옥으로 들어가면 관천대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실제 올라가 본 책의 저자에 의하면 그렇게 올라가 보는 관천대는 밖에서 볼 때와는 영 딴판이다. 언제 한번 그리 올라가 보아야겠다. 저자는 현대 사옥 자리에 있었던 휘문(徽文)고등학교가 민영휘(閔泳徽)의 휘()에 문()을 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휘문고등학교는 민영휘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으면서 개교한 학교이다. 휘문고등학교는 휘문 의숙(義塾)의 후신이다.

 

저자는 공간(空間)사옥(社屋)을 언급한다. 설계자 김수근 건축가 이야기인데 김수근은 사옥과 함께 문화 예술 공연장을 만들었다. 돈만 들어가고 신경은 많이 쓰이는 시설이다. 이런 점에서 김수근은 존경을 받을 만하고 이는 경위가 다소 다르지만 앞서 말한 정세권을 연상하게 한다.

 

공간 사옥은 겉에서 보기에는 4층짜리 건물로 보이지만 안은 작은 공간들이 중첩되어 있어 10층처럼 보인다.(72 페이지) 저자는 공간 사옥의 입체적인 면모를 한옥과 연결짓는다. 한옥은 입체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기단 섬돌 마루 누의 중층성이 그것이다. 공간 사옥 내부는 한국의 골목길을 재현했다.

 

저자는 창덕궁 서문인 금호문(金虎門)을 이야기한다. 일제 시기에 송학선이란 분이 일본 총독을 죽이려고 시도한 문이다. 안중근을 존경하던 그는 안중근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저자는 민재무관댁(민형기 가옥 또는 계동마님댁)에서 변한 북촌문화센터를 언급한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의 집 치고는 작다. 복원할 때 다소 줄어들었다. 솟을 대문이 없어진 것이다.

 

이 집은 양반이 짓고 그 양반이 살았던 집이 아니라 양반 부인이 혼자가 된 뒤 짓고 아들 부부와 함께 살던 집이다. 이 건물은 3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양반의 부인이 지은 것이기에 규모와 위용을 갖추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91 페이지)

 

민형기 가옥이라 했지만 민형기가 이 집에 산 적은 없다. 민형기가 일찍 죽고 그의 부인 유진경이 아들과 함께 1921년 이 집을 지었다. 계동 마님 이규숙이 유진경의 며느리이다. 이 집은 창덕궁 연경당을 모델로 삼아 지은 건물이다.

 

순조 아들 효명세자가 1820년대 후반 사대부들의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고 순조에게 존호를 바치는 행사를 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연경(演慶)이란 경사스런 행사를 연행한다는 의미이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 놓았다. 계동마님댁은 안채와 사랑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어 흡사 다른 채처럼 보이지만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어 왕래가 가능하다.

 

이 집은 민경휘(유진경의 아들)의 친구에게 팔렸다. 아들을 낳지 못한 친구가 아들 둘을 연달아 낳은 민경휘를 보고 제의한 것이다. 한옥지원센터는 20159월 게스트 하우스에서 바뀐 건물이다. 이곳에 구들 모형이 있다. 저자는 지금 한국인들이 쓰는 난방법은 온돌이 아니라 말한다. 진정한 온돌이라면 아궁이, 구들, 개자리가 있어야 한다. 개자리는 연기가 나가고 역류하지 않게 하는 장치이다.

 

저자는 초가도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대부분의 선조들이 살던 집은 기와가 아니라 초가였기 때문이다. 락고재는 호텔 급의 게스트 하우스이다. 이병도가 살던 집이다.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진단(震檀)이란 예전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진은 중국의 동쪽이고 단은 단군을 말한다.(106 페이지) 진단학회는 식민사학적 연구를 한 단체이다.

 

저자는 이병도를 비판하려면 그의 책을 다 읽고 해야 하는데 자신은 그런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3.1 운동때 천도교 대표와 기독교 대표가 만난 김사용 집을 말하며 3.1 운동의 주체는 천도교라 말한다.(당시 조선에서 천도교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종교였다.: 129 페이지) 대동세무학교는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인력거꾼들의 자식들을 위해 고창한(1873 1945) 선생이 지은 학교이다.(140 페이지)

 

이 학교는 높은 곳의 건물인데 일일이 물장수들과 차부(인력거꾼)들이 보수를 전혀 받지 않고 자재들을 날랐고 건물 옆의 왕모래 산을 파내 운동장을 넓게 만들고 그 흙으로 담을 쌓는 노가다를 해주었다니 감동적이다.(142, 143 페이지) 저자는 배렴(1911 1968) 가옥도 언급한다. 50대 중반에 교수가 된, 실경산수화를 그린 동양화가로 알려진 분이다. 이 집의 특징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수덕사 서울 분원인 격외사(格外寺)를 이야기한다. 매주 금요일 철야 선()을 한다는 소식이다. 지도 법사는 화두선이 아닌 수식관(數息觀) 전공이라고 하니 반갑다. 이 절 인근에 유심사(惟心社)가 있다. 유심 잡지가 폐간된 이후 거의 폐가 상태가 된 이 건물은 조계종이 인수를 거부하고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이 아닌 의 노력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석정(石井) 보름 우물도 저자는 언급한다. 이 물은 한국에서 이루어진 천주교의 첫 미사 때 성수(聖水)로 사용되었다. 이 미사의 주인공은 중국의 주문모(周文謨) 신부이다. 북촌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 1965)의 집도 있다. 그는 유학 가기 전 당시 최고의 동양화가였던 안중식이나 조석진으로부터 동양화를 배웠으나 동양화의 진부함에 서양화로 전공을 바꾸었다.(170 페이지) 물론 그는 1920년대 이후 동양(한국)화로 다시 돌아왔다.

 

저자는 송진우 선생이 암살당한 집()도 이야기한다. 북촌 끝자락에 빨래터가 있다. 신선원전 대문도 이야기된다. 선원전(璿源殿)에 선왕의 초상화가 모셔진다. 이는 왕과 동격으로 인정된다. 선원전은 왕을 따라 움직이는 운명이어서 그때 그때 소재하는 곳이 다르다.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창덕궁 서북쪽 끝의 후미진 것이었다. 명나라 신종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조선에서 신종이 임란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했다고 생각해 은혜를 갚고자 숙종대에 돌로 제단을 만들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만이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중화사상의 적자(適者)라는 생각을 했으리라.(184 페이지) 문제는 이를 청나라 몰래 해야 했기에 보안 유지 차원에서 궐내에서도 후미진 곳에 만들었다.

 

자자는 한샘연구소와 백홍범 가옥, 궁중음식연구원도 언급한다. 황혜성 선생이 한희순이라는 상궁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다. 1대 기능 보유자 한희순, 2대 기능 보유자 황혜성, 3대 기능 보유자 한복려(황혜성 선생의 따님)이라는 계보가 만들어진다. 한희순 상궁은 고종 39(1902) 덕수궁 주방 나인으로 입궁했다.

 

저자는 한희순 선생의 수라간에서의 위치를 궁금해 한다. 당시 수라간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수라간에서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141이었다고 한다. 여자들은 허드레 일을 했다.(196 페이지)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책임지고 강제 퇴위 당했을 때 대궐의 내시들과 남자 요리사들이 대거 해고되었다. 이 이후 궁녀들이 요리를 담당하게 되었다.(197 페이지)

 

중앙고등학교도 이야기 해야 한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같은 분들이 이 학교 숙직실에 모여 3.1 운동 거사를 모의했다.(김성수가 이 학교 1회 졸업생이다.) 이 학교는 설계자가 고려대를 설계한 박동진으로 그런 까닭에 고려대와 건물이 닮았다. 중앙고등학교는 신선원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학교는 주말에만 외부인들에게 방문을 허락한다.)

 

저자의 설명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건축 전문가가 아니기에 어려운 양식 이야기 대신 구조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고 역사적 이슈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점이다.

 

이병도 등의 친일에 대해 자신이 그의 자료를 다 읽은 것이기에 이야기할 수 없다며 그런 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 분위기로 인한 결과로 처리한 것도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답사 책이기에 문제삼을 여지는 없다. (西) 북촌 책은 언제 나올지 기대된다. 건축 양식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엉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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