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의 상징폭력이란 개념은 참으로 의미 있는 개념이다. 오독일 수도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말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이 개념은 학계에서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정받는 최고 학자의 학문적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치르는 진입의 고통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특정 저술을 통해 선학(先學)들과 대화 또는 대결하는 상징적 공간에 진입해 그 공간에서 필요로 하는 과제를 연구하고 시간과 경제력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또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선별적인 것이다.

 

오늘 또 한 권의 주역 책을 사며 나는 내가 주역 연구에 시간과 경제력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폭력을 자초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황홀한 글 감옥(조정래 작가의 표현)이란 말처럼 상징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의미로운 일이다.

 

오늘 산 주역 책의 추천사 가운데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가지고 싶은 책들 중 꼭 한 권 밖에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기에 젊은 시절부터 오래도록 책을 까다롭게 골랐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 책이나 사들고 들어오는 편이라는 글이다.

 

슬프지만 이 글에서 나는 내 젊은 시절을 보았다. 새 것이나 다름 없고 필독하지 않을 수 없는 알라딘의 좋은 중고 책들에 홀려 지난 3개월간 실제 구입액이 397천원에 이르렀다는 메일을 받았다.

 

책을 줄곧 좋아했지만 이렇듯 무분별하다 싶을 만큼 많은 책을 구입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확정지을 것은 없다. 다만 (아직 장담하기가 꺼려지지만) 건강(위장) 문제가 해결된 것을 자축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할 수 있겠다 싶다.

 

지금부터는 컨디션이 좋다고 책을 펑펑 사기보다 생각으로 짓는 내 집이 그럴 듯 해서, 거기에 화룡점정할 만 해 책을 펑펑 사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리라. 지출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지 못한 읽기가 안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사족처럼 달아야겠다. 자백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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