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영 교수의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는 사유를 자극하고 감흥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원정(園亭)을 보는 두 가지 풍경을 제시한다. 하나는 시적 풍경, 다른 하나는 회화적 풍경이다.
시적 풍경은 문학적 상상을 통해 채색되고 회화적 풍경은 그림으로 채색된다.(정원庭園)이란 명칭은 일본식 용어이다.) 시적 풍경의 주인공인 시인과 회화적 풍경의 주인공인 화가는 각기 다른 위상을 갖는다.
시인이 계절이라는 시간을 마음대로 불러온다면 화가는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다. 시는 공간적 한계가 전제되고 그림은 시간적 제약이 전제되는 것이다. 공간을 자유자재로 뛰어넘을 수 있는 화가의 예로 겸재 정선을 들 수 있다.
그가 그린 ‘만폭동’은 한 자리에 앉아 사생(寫生)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만폭동’은 정선이 계곡 아래쪽에서, 그리고 높은 절벽 꼭대기에서 본 장면들을 멋지게 합성한 구도(構圖)의 그림이다.(이종수 지음 ‘옛 그림 읽는 법’ 89 페이지)
박은영 교수의 책에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전문이 번역되어 있다. 강릉 선교장의 사랑(舍廊)인 열화당(悅話堂)과 전남 보성의 열화정(悅話停)은 모두 ’귀거래사‘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즐거운 이야기를 의미하는 열화는 “돌아가자/ 사귐도 어울림도 이젠 모두 끊으리라/ 세상과 나는 어긋나기만 하니...친척 이웃들과 기쁘게 이야기 나누고.”란 말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 구절 다음에 “거문고와 글 즐기니 근심이 사라진다“는 구절이 있다.(樂琴書以消憂)
책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부분은 춘오(春塢)라는 말이다. 봄 언덕이란 의미이다. 잘 알듯 담헌(澹軒) 홍대용의 별장 이름이 유춘오(留春塢)이다. 그런데 해당춘오란 이름이 박은영 교수의 책에 나온다. 해당춘오(海堂春塢)이다. 이는 중국 주오정위안의 중부에 있는 정원이다.
봄날 해당화 피는 담장이란 뜻을 가진 해당춘오는 방 두 칸, 잡석 몇 개, 수죽(樹竹) 몇 그루가 있는 소박한 정원이다. 수죽(樹竹)이란 이름에 걸맞게 해당춘오에는 해당화와 대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이를 해당화의 짧은 시간과 대나무의 오랜 시간을 對比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라 말한다.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심대하다. 그제 ’시간과 공간으로 풀어낸 서울 건축문화사‘ 강의에서 강사 박희용 님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 – 1543)의 ’대사(大使)들‘과 마사초(Masaccio: 1401 – 1428)의 ’성(聖) 삼위일체‘를 대비시켜 설명했다.
정면을 응시하는 두 남자가 전면을 장식하는 그림인 1533년 작품 ’대사들‘에는 태양광과 태양시를 계산하는 데 사용하는 복합 태양관측기, 하늘에서 태양의 위치를 측정하는 육분의(六分儀), 장난감 팽이처럼 생긴 9면체의 별자리 파악하는 도구 등이 있어 작업장 조직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타낸다.(리처드 세넷 지음 ’투게더‘ 165, 166 페이지)
중요한 것은 화폭 맨 아래쪽에 자리한 죽음의 두상(頭狀)이다. 왜상화법(歪像畵法)으로 그려진 이 장치는 감상자가 옆으로 비껴서야만 보인다.(리처드 세넷 지음 ’투게더‘ 168 페이지) 마사초는 ’성삼위일체‘를 통해 원근법을 최초로 선보인 화가이다.
요점은 홀바인의 ’대사들‘에 나오는 두개골은 있는데 못 보는 것이고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는 그림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상상력(의 힘)이다. 박은영 교수에 의하면 예술적 상상력은 제약이 없는 열린 주위 환경의 맥락(context)에서 특정 부분(텍스트)을 잘라내는 행위를 의미하는 틀 짜기(프레이밍)에서 나온다. 이것이 예술에서 필연적인 추상화 작업이다.
세계를 전체로 바라보지 않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조감하는 것이 틀 짜기인데 물론 부분의 조합을 통해 인식되는 전체는 처음의 전체와 다르다.(’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 93, 94 페이지)
전호근 교수는 세한도(歲寒圖)를 예시하며 추사(秋史)의 그림을 감상할 때는 문자의 향(香)이라 할 수 있는 정신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29 페이지) 전호근 교수에 의하면 ’세한도‘는 김정희가 유배지인 제주 풍경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닐뿐더러 종(種)을 알 수 없는 나무와 있을 수 없는 집을 그린 괴이한 그림이다.
나는 상상력(의 힘)을 인정한다. 물론 상상력도 공부를 통해 더욱 유연하고 깊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해 푸코가 가한 해석을 이해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푸코가 가한 해석이란 그가 ‘말과 사물’의 1장에서 제시한 것을 말한다.
나는 지금 이지영 교수가 그 부분을 설명한 글을 앞두고 있다. 이 글은 여러 필자가 쓴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에 속한 ‘운동과 시간, 그리고 인간: 르네상스 원근법과 수태고지 그리고 바로크’란 글이다. 필자는 맨 처음 푸코의 분석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이 떠오른다는 말을 했다.(‘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258 페이지)
이성과 감성 모두 필요한 읽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나는 바로 그 글을 읽기 전에 필자의 신간인 ‘BTS 예술혁명 - 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를 주문했다. 푸코의 ’시녀들‘ 해석과 관련이 없지만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우회의 독서도 어느 시점에선가 빛을 발하리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