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상상계라는 말은 현실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일정 정도 착각하거나 잘못 상상하거나 그릇된 믿음을 갖지 않고서는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가령 현실은 단편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한정 묘사만 하고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묘사한 후 그것이 완벽한(무모순의) 진술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의미의 고정점이라고 할까.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라캉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진술 때문이다.

그 이후 구조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통해 그가 혁명적이고 전복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홍준기 교수의 글을 읽으면 라캉은 대단히 문제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홍준기 교수의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다.

어떻든 라캉의 이론과 사유는 비인간적이고 모순적이고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이론이 공허하다는 사실이다. 남의 이론을 가져다 출처도 명기하지 않고 써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그것이 그 자신의 고유한 이론인 것처럼 오인하게 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라캉 비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단서는 멜라니 클라인의 ‘좋은 엄마‘라는 개념이다.

라캉 비판은 소칼과 브리크몽의 ‘지적 사기‘의 그것과 다르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의 이론으로부터도 영감을 얻을 수 있으면 그래야 한다.

* 32, 000원 짜리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7, 000원에 사고 나니 득템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판매한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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