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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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시를 읽은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이데거가 ‘모든 시인 중의 시인’이라며 극찬했던 시인, 윤동주와 김춘수 시인이 좋아했던 시인.
하지만 의외로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시를 가장 많이 접할 때는 수능 국어 영역 공부를 할 때인데, 국어 영역은 외국 시보다는 한국 시 위주로 출제되기 때문에 한국 시만 주로 읽었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은 릴케의 초기 작품들만을 모아둔 책이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 소재가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일상의 풍요로움을 언어로 옮기는 것에 신경 쓰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러한 그의 작품관이 이 시집에 잘 드러나 있다. 릴케는 정처없이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녔고, 그러면서 많은 것들과 마주쳤다. - 별, 장미꽃, 소녀, 성당, 그림 등 - 그리고 그 마주친 것들 전부가 그에게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을, 슬픔을, 그리고 고독을 보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그의 신(神)과 마주치기도 하였다. 일상에서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의 시는 한 사람이 쓴 작품 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시에서는 소녀의 사랑스러움을 노래하지만, 또 다른 시에서는 마치 타고르의 <기탄잘리>가 연상될만큼 종교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성격이 판이한, 다채로운 작품을 남길 수 있다니, ‘모든 시인 중의 시인’이라는 찬사가 전혀 과한 찬사가 아니라는걸 느낀다.

은빛으로 밝은

은빛으로 밝은, 눈이 쌓인 밤의 품에 널찍이 누워
모든 것은 졸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만이
누군가의 영혼의 고독 속에 잠 깨어 있을 뿐.

너는 묻는다. 영혼은 왜 말이 없느냐고
왜 밤의 품속으로 슬픔을 부어 넣지 않느냐고 -
그러나 영혼은 알고 있다. 슬픔이 그에게서 사라지면
별들이 모두 빛을 잃고 마는 것을.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축제일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길을 걷는 어린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어린 아이는 꽃잎을 주워서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데도
머리카락에 앉은 꽃잎을 가볍게 털어버린다.
그러고는 앳된 나이의
새로운 꽃잎에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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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억 광년의 고독 대산세계문학총서 81
다니카와 슈운타로 지음, 김응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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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 62

세계가 나를 사랑해주기에
(잔혹한 방법으로 때로는 상냥한 방법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혼자일 수 있다

내게 처음 한 사람이 주어졌을 때에도
나는 그저 세계의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내게는 단순한 슬픔과 기쁨만이 분명하다
나는 언제나 세계의 것이니까

하늘에게 나무에게 사람에게
나는 스스로를 내던진다
마침내 세계의 풍요로움 그 자체가 되기 위해

...... 나는 사람을 부른다
그러자 세계가 뒤돌아본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다

9월의 노래

당신께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슬픔이 아니지
바람에 흔들리는 맨드라미를
말없이 바라본다

당신 곁에서 울 수 있다면
그건 슬픔이 아니지
파도 소리 반복되는 저 파도 소리는
내 마음 늙어가는 소리

슬픔은 언제나
낯설다
당신 탓이 아니다
내 탓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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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ttoman Army 1914–18 (Paperback)
David Nicolle / Osprey Pub Co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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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군대에 대한 개론서.
저자는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독일군 장교들의 지휘에 의존했던, 무능한 군대라는 이미지를 깨고 싶다고 말하며, 이러한 이미지는 서구권에 소개된,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대한 자료가 대부분 독일군 장교들의 수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책 내용을 보면 독일군 장교에게 의존을 한건 오해라고 쳐도 무능한 군대 이미지는 깨기 힘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도 다민족 국가였기에 명령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고, 무엇보다 아랍 민족주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아랍 출신 병사들의 충성심이 의심받는 상황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등 정교도 출신들 중에는 러시아에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탈영률도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압둘 하미드 2세 치하 때부터 군대의 근대화 바람이 불었지만, 1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도 군대의 근대화는 요원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뒤늦게 동맹국으로서 전쟁에 뛰어들자, 독일이 군사 지원을 하긴 했지만 정작 독일도 양쪽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터라 그 지원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육군은 중포, 기관총이 부족하여 현대전을 펼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였고, 해군은 대부분 19세기에 건조된 함선과 전노급 전함들을 운용하고 있었다. (독일로부터 순양전함과 경순양함 1척씩을 양도받고 각각 <술탄 셀림 야부즈>, <미딜리>로 개명해서 운용했지만 이 함선들을 제외하고는 연합국 해군과 전투를 벌이기가 민망할 정도의 전력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문제였던 것은 극악에 가까운 교통망이었는데 독일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만든 아나톨리아, 바그다드 철도가 있었지만 이들 철도는 운영이 부실해 대규모 군사 수송에는 부적합하였다. 도로망이 잘 정비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주로 도보에 의존해서 이동하였고, 이것은 후일 코카서스 전선에서 전투 이외의 요인으로 대규모 병력 손실을 입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된다.

책을 읽고나서도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이미지는 기존에 알고 있던 이미지 그대로였다. 다만 ‘오스만 투르크 군대’라는, 1차대전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소재를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군복, 군장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화려한 칼라 삽화가 이 책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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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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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것, 특히 ‘홀로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기도요, 고독한 수행(修行)과 같다. ‘홀로 기억하는 이’의 눈에, 다른 이들은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즐거움 자체가 ‘홀로 기억하는 이’에게는 의도치 않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망각을 하면 이 고된 수행으로부터 해방되겠지만, ‘홀로 기억하는 이’에게 ‘기억’이란 자신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요, 기억의 소멸은 육체의 절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괴로워하면서도 그 ‘기억’과 함께 한다.
허수경의 시에서는 단순히 고독함을 넘어, 그리움, 그리고 이미 상실해버려 잊혀진 것들을 ‘홀로 기억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다만 매캐하고 자욱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던 시간은 불꽃을 삼키며 허기를 채우는데

나도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도 몇 장의 허기처럼 뒹굴 나뭇잎들을 산책길에 떨구었다

그도 멀리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아플까
내 목소리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목소리가 되는가
그리고 그런, 이름들은 무엇이었는가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드는 계절이었다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들어 자욱해지는 계절이었다

- <매캐함 자욱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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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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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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