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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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것, 특히 ‘홀로 기억하는 것’은 하나의 기도요, 고독한 수행(修行)과 같다. ‘홀로 기억하는 이’의 눈에, 다른 이들은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고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즐거움 자체가 ‘홀로 기억하는 이’에게는 의도치 않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망각을 하면 이 고된 수행으로부터 해방되겠지만, ‘홀로 기억하는 이’에게 ‘기억’이란 자신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요, 기억의 소멸은 육체의 절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괴로워하면서도 그 ‘기억’과 함께 한다.
허수경의 시에서는 단순히 고독함을 넘어, 그리움, 그리고 이미 상실해버려 잊혀진 것들을 ‘홀로 기억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다만 매캐하고 자욱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던 시간은 불꽃을 삼키며 허기를 채우는데

나도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도 몇 장의 허기처럼 뒹굴 나뭇잎들을 산책길에 떨구었다

그도 멀리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아플까
내 목소리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목소리가 되는가
그리고 그런, 이름들은 무엇이었는가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드는 계절이었다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들어 자욱해지는 계절이었다

- <매캐함 자욱함>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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