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있는 풍경
이상엽 사진.글 / 산책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 '이상엽'이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라 그런지 한 컷 한 컷 실려 있는 낯선 러시아의 풍경들이 귀티가 흘러 넘친다. 색감과 느낌이 1000만 화소를 넘나드는 요즈음 디카와는 확연히 다른 중후한 멋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비밀은 사진을 담는 클래식 카메라에 있었다. 놀랄만큼 화려하지도, 특별히 선명하지도 않지만, 사진 작가가 보고 느꼈던 당시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무한한 상상의 도전을 선사하는 멋진 사진들이었다. 제목부터 근사한 <레닌이 있는 풍경>은 지은이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아홉군데에 이르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도시를 추억하는 사진집이자 기행문이다. 착착 감기는 아늑한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데, 사진작가의 근사한 작품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다니. 일석이조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내가 지극히 편애하는 나라 러시아의 보기드문 여행기라서 더욱 그렇다.

  처음 러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건 러시아 작가들을 동경하면서부터이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문호를 몇 명이나 탄생시킨 러시아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 느꼈다. 러시아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존경하는 작가들, 예술가들. 그리고 차가운 얼음의 도시, 눈의 풍경들이 아스라이 그려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를 실제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스크바의 눈 축제도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던 블라디보스토크는 이상하게도 몇 번이나 가본 것처럼 예전부터 친숙하게 느껴졌었다. 위험하지만, 묘한 매력이 넘쳐흐르는 나라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나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훌쩍 떠날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상상을 자꾸만 해 보게 된다. 지은이는 20년만에 꿈을 이뤘다고 하는데, 나도 20 후에는 가능한걸까? 그때쯤이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기차를 타고 남한까지 이르는 긴 여정의 마침표를 턱하니 찍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러시아의 역사에 해박한건 결코 아니지만, 관심이 있기에 대략의 윤곽은 알고 있다.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렇겠지만, 유독 러시아의 역사가 다시다난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잦은 전쟁과 혁명에 있을 것이다. 양차 대전에 참전해서 전 세계로부터 질시와 비난을 받기도 했고, 사회주의 쿠테타와 연이은 혁명들로 가뜩이나 추운 러시아는 왠지 더욱 황폐하게만 느껴지도 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진들의 음울한 모노톤 빛깔처럼 조금은 우울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클래식하기도 한, 새하얀 겨울의 러시아는 항상 묘한 이질감 같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러시아의 정신 '레닌'을 추억하며 그 풍경 속에 서 있었던 작가가 참 부러웠다. 안개 낀 뿌연 하늘과 비가 내릴 듯 찌뿌둥한 회색빛 도시들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과 1세기 사이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러시아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을 국민들의 희생을 되새겨 보지 않았을까. 그토록 열광했지만, 이제는 점점 녹슬어 가는 레닌의 동상을 스쳐지나가는 그들의 섬세한 움직임은 살아 남은 자들은 여전히 오늘을 살아간다는 침묵의 외침처럼 들려온다. 그래서 서글프고 애잔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과 글,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들었던 알찬 책이었는데, 더 좋았던 점은 중간 중간 기차 여행시 읽으면 좋은 책을 소개한 저자의 추천 도서들이었다. '20세기 소년' 외에는 다행히 나와 인연이 되었던 책은 없기에, 차근 차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을 때 읽어보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건 아마도 20년쯤 후에나 가능할테니…. 간결하고 흥미진진한 소개문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기에, 마침 그간 관심있게 지켜봤던 몇몇 책들을 먼저 읽어봐야겠다. 따뜻한 작가의 섬세한 배려가 너무도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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