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렸을 적 썼던 일기장을 읽어보며 문득 소스라치게 놀랐던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게 짝이 없는 ‘살의’를 그 어렸던 시절의 내가, 아무렇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휘갈겨 쓴 글씨로 누군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끔찍하고 잔인한 감정을 품을 수 있었던 모습이 지금은 전혀 기억 나지조차 않지만, 당시의 나로썬 온 몸을 다 바쳐 저항하고픈 고통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 혹은 ‘누군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문제가 많은 가정일수록 가족 중 누군가의 부재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가령 폭력이나 강간에 시달리는 어린 여학생의 경우, 아동 시기에 자리 잡은 증오의 표출은 숨죽인 채 참는 수밖에 달리 해결 방법이 없기에 차라리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가 자연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도저히 가정사에 대한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없어 참으며 빈 방에 웅크리고 있었던 기억. 누구나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열 세 살의 같은 반 두 여학생이 주인공이다.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한 척 가장하는 ‘아오이’와 묘한 고딕풍의 차가운 소녀 ‘시즈카’. 어떠한 계기로 두 소녀는 친구가 되어 살인의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한다. 여린 소녀 둘이서 겪는 질풍노도의 공황상태는 그 시절에만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특권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은 바꾸어 생각해 보면,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 자신을 아껴주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자기 방어의 수단이다.

  어렸을 적, 황폐한 어른들의 공격으로 고통을 안게 되는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 섬뜩한 면도 있었고, 같은 동질감을 느꼈던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성장 소설과 미스터리 소설의 어정쩡한 경계에 머물러있다. 강한 임팩트가 빠진 싱거운 숭늉 같은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서 후반에 등장하는 줄거리가 「지푸라기 여자」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가졌는데, 정말 이 책에 등장해서 놀라웠다. ‘카트린 아를레’에 대한 ‘사쿠라바 가즈키’의 오마주? 실질적으로 책의 제목과 줄거리까지 인용하여 등장시켰다는 점을 보면 작가도 그 책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던 것이 분명하다.

  잠시 사족을 붙이자면, 나 역시 「지푸라기 여자」를 굉장히 강렬하게 읽었다. 오래되어 노랗게 빛바랜 낡은 문고본으로 읽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지금이야 워낙 흔한 줄거리가 되어버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서스펜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생각난 김에 조만간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어보며 비교를 해봐야겠다.

  여하튼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소녀들이 느끼는 성장기의 아픔과 고통들을 또렷하게 전해주는 잔혹 동화 같은 소설이다. 아픔을 털어 놓을 상대가 없어 혼자 괴로워하고, 친구들과의 사교에 문제가 생겨 쩔쩔 매고, 누구에게나 사랑받기를 원하는 평범한 열 세 살의 소녀. 그러나 여러분 들 중 누구라도 고민이나 아픔은 혼자 묻어둔 채 동굴 속을 갖혀 있지 않기를 바란다. 혼자 끙끙 앓다보면,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증오하는 상대를 향한 살의로 빚어진 살인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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