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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철학한다
이광래 지음 / 미술문화 / 2007년 3월
평점 :
“철학, 예술, 과학은 구별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서로 다른 본질을 통해 연장되면서 끊임없이 서로 따라다니는 동일한 그림자를 나눠 갖고 있는 듯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 기타리, 들뢰즈」
실제로 철학만 알고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사람은 철학마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것은 미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술만 알고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사람은 미술마저도 모르는 사람이다. - 8P
본서는 이렇듯 강렬한 서문으로 미술에 대한 철학 탐색을 시작하고 있다. 한 가지 학문의 사고방식으로 획일화 된 틀에 갇혀 있을지라도 모든 학문은 서로 소통하듯 대화를 시도한다. 과학과 수학, 언어와 문화, 문학과 사회, 그리고 미술과 철학……. 각각을 담는 형식의 틀만 다를 뿐, 동일한 그림자를 나눠 갖고 있듯이 서로서로 소통하듯 닮아있다. 미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를 공부해야 하고,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주제가 가진 의미나 미술가의 사상, 나아가 회의적인 미술에 대한 비평과 탐색 역시 이루어져야 한다.
전문가도 아닌데 미술을 왜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은 관람자의 자유이며, 불필요한 해석과 철학적인 탐구는 오히려 관람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가 아닌가? 혹자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반문의 여지가 없겠지만, 미술을 천천히 철학해 본다면 어려움과 동시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미술만 알기에, 결국은 미술마저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종말과 더불어 불거진 미술의 종말론.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나에게 먼 미래의 일인 것만 같아서 부인하고 싶다. 오히려 극 사실주의에서 추상적으로 변모하며 파괴되어 가는 미술의 형식을 보면서 과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어떠한 미술이 쏟아져 나올지 몹시 궁금하기만 하다. 인류의 유일한 시각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미술의 종말론이 자못 씁쓸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희망으로 보이기도 하다.
예술을 결정짓는 요소, 즉 시각으로 전해오는 아름다운 이미지의 근원이 될, 미(美)라는 형식이 언제부터인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폭발적으로 변화하여 흘러가듯 표류하는 현대 미술을 과연 철학으로 해석해 본다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내기조차 힘들 것 같다. 피카소의 발작적인, 그리고 강압적인 추상화들의 난해함. 더 나아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폴록의 기하학 무늬를 보면서, 그 그림들을 과연 어떻게 읽어내야 하며, 어떻게 받아들 것인가, 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의 해답조차 찾기 힘들었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즐길 수만 있다면 예술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했던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과분한 소유욕을 불러 일으키던 유명 화가들의 전시물에서부터, 지나친 자유분방함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기하학, 탈자연화 한 미술들까지 욕망의 분출구로서 하나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언제부터 미술은 사상 자체를 파괴하는 형식을 안고 관람객을 찾아와 미친 듯이 표류하기 시작했을까. 관음증에 걸린 사람마냥 자신도 타자를 훔쳐보며 즐기던 시대의 합법적인 욕망 분출구. 그것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예술작품의 생명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그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그 시대의 문명의 상태이다. 예술에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예술은 시대를 초월해 영원히 존재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신화가 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왕도 - 앙드레 말로」
기나긴 예술의 역사만 보더라도 작품에게 시간의 흐름이란 중요치 않다. 다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유 가치의 상승만이 존재할 뿐이다. 마치 일정하게 분비되는 불순물들을 한데 섞어서 정화 시키는 작업을 하듯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그토록 치열한 미술에서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들의 욕망이 일정한 속도로 표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가뿐만이 아니라 관람자 역시 마찬가지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소시민적 이데올로기가 마치 커다란 재산인양 받아들여지면서 미니멀리즘에 열광한다. 재현하지 못해 안달하는 미술가들이나, 전시품을 관람하지 못해 안달하는 관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산실이 아닐까 싶다.
모든 종말이 그렇듯 미술의 종말도 그것을 철학적(이성적) 반성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대상에서 비대상으로, 재현에서 표현으로처럼 미술은 또다시 철학적 반성과 더불어 해탈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시공간의 통섭이든 포월이든 미술은 또 다른 욕망의 표류를 시작하려 한다. 인간의 조건인 욕망의 표류에는 종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140P
어지럽다. 현기증이 난다. 미술가들의 나르시시즘적 리비도, 누드를 탐하는 억압과 해방, 현대미술의 시뮬라르크, 신노마디즘……. 철학자에게는 길가의 풀 한포기 조차 지나친 상념을 줄 텐데, 하물며 철학의 주제를 미술이라 정의 내린다면 더욱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사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시작한다. 간혹 이렇게 무언가를 열망하게 만드는 책을 만날 때는 골치가 아프다. 사물의 문제는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자의 눈에 있다. 내 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 그리고 미술사의 종말이 없는 한, 더욱 진지하게 미술의 철학적 문제들을 탐색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