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의 알약
슈테피 폰 볼프 지음, 이수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낄낄거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므로 혼자서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간혹 웃음을 참기 힘들어 소리 내어 웃을 때도 있었다. ‘릴리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엽기적인 독일 아가씨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나 감칠맛 나게 코믹하던지……. ‘웃찾사’ 저리 가라 할 만큼 우습고 재밌는 대사들과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에 부합되게 웃음 꽃 선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릴리안의 알약」의 배경은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던 16세기 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르네상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고, 독일에서도 비슷한 시대적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자들의 지위가 낮았던 중세시대, 여성들은 마초의 남자들에게 휘둘리며 원하지 않는 성행위와 더불어 임신까지 해야만 했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여자들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피임약이 발명되기 전, 여성들은 과연 어떻게 만일의 사태에 대처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확답은 물론 기대할 수 없었기에, 이 소설이 중세의 여성들에 대한 재기발랄한 재해석을 하게 되었던 듯하다.

16세기 독일. 여느 유럽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주의 초야권이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가한 횡포들. 교수형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지켜봐야만 했던 시민들. 페스트가 창궐하여 유럽 전 지역을 휩쓸어 죽어가는 시체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시대적 상황이지만,「릴리안의 알약」을 읽어본다면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의 걱정을 지우고 한층 가볍게 당시의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 ‘릴리안’과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한 마디로 ‘재밌고도 나사가 여럿 빠진 듯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도피 행각에 빠져들어 본다면.

주인공 ‘릴리안’은 18살의 호기심 왕성한, 그리고 다소 엽기적인 발상의 소유자다. 우연히 마녀의 마법 레시피로 피임약을 발견하게 되었고, 동물 실험에 이어 인체 실험까지 성공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릴리안의 알약’은 빠른 속도로 여성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녀로 오인 받은 릴리안과 체칠리에는 묘한 동행인들과 함께 도피 행각을 벌이는데, 다른 지방을 옮겨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또한 하나 같이 재미있으면서도 괴상한 캐릭터 투성이다. 하다못해 릴리안의 애완동물들의 이름 또한 어찌나 재밌는지. 피임약의 키워드 ‘팜파탈’과 무지하게 말을 안 듣는 ‘소시지’!

역사물의 일명, ‘묻지 마. 패러디’. 출처도 불분명하고 사건의 정확성이나 인물의 연대기 또한 부정확할 지라도 친숙한 역사속의 인물들이 대거 출연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재미를 주기엔 충분하다. 의적 ‘로빈 훗’을 비롯하여,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소심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그리고 지나치게 유명한 화가들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까지! ‘로빈 훗’에서부터 시작해 돌고 돌아 어느덧 르네상스 3대 화가 중에 2명이나 등장하기에 이른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스토리에 빠져들다 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에서 한참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긴 하지만, 귀여운 릴리안 때문에 또다시 웃어버리고 만다.

아쉬운 점은 앞서 말했다 시피, 후반으로 갈수록 이 책의 핵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초반, 임신 문제로 인해 난황을 겪는 여성들의 문제를 좀 더 중점적으로 다루었더라면 아무리 코미디물이라도 당시 사회를 예리하게 비꼬는 풍자 소설처럼 조금 더 진지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다소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역사 속의 인물들은 패러디의 특성상 출연을 반갑게 맞아줄 수 있지만, 굳이 첨가하지 않아도 무방한 부분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지금이야 워낙 피임 방법이나 약 등이 대중화 되었으니 실수하는 경우가 적지만, 피임약이 없던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기는 족족 낳아야 하고, 그만큼 태아의 사망률도 높았다고 한다. 지금 시대는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 라는 슬로건 아닌 슬로건을 내세우고 자식을 천금마냥 아끼며 보살피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치부한다지만, 중세의 그녀들처럼 마치 방목하듯 여럿을 낳아서 키울 수 있었던 시절이 어쩌면 지금보다는 웃을 일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당시를 회상하는 듯한 기발한 상상력과 재미있는 캐릭터들의 결합 덕택에 킥킥거리며 웃을 수 있었던 즐거운 릴리안과의 데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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