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타락론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8
사카구치 안고 지음, 최정아 옮김 / 책세상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집은 지나치게 일본적인, 언어로 정의 내리기 까다로운 불연적인 요소들이 가득 포함되어 있다. 대표작 「백치」와 「타락론」을 비롯해 수록된 총 아홉 편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강인한 개성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국내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후 일본 문학사에 ‘다자이 오사무’와 함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근현대 문학의 지평을 연 작가이다.

  ‘사카구치 안고’의 작품 하나 같이 동일한 질량의 염세적인 감정이 배어있는 듯하다. 삶의 고독을 느끼게 해주는 문학 작품들이 대게 그렇듯이 어딘가 모르게 퇴폐적이면서 음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마지막에는 밝은 희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들이 하나 같이 어둡지만 청렴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면 소설을 읽고 난 후, 어떤 느낌일지 설명이 될 런지 모르겠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처음에 수록된 「돌의 생각」이다. 가장 먼저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뇌리에 강인하게 각인이 되어 있다. 글의 화자 ‘나’의 삶의 고백은 매우 담담했고, 솔직했다. 지나치게 담담하게 써 내려갔지만, 주인공이 겪는 외로움에 대한 몸부림과 사람냄새에 대한 그리움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타인으로부터 겪은 외로움의 근원을 마땅히 표출하는 방법을 몰랐던 어린 소년이 세월의 변화를 거치지만 여전히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륜의 방정식을 읊는 듯 했다.

  패전 후 황량한 일본 열도의 풍경을 삭막하고 메마른 문체로 써내려간 「백치」와「타락론」역시 고독의 무게감이 삶 곳곳에 내제되어 있다. 전쟁 후 새로운 식구가 된 백치 여인을 바라보는 이자와의 시선. 최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지 않으면서 가장 담백한 방법으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진 듯하다. 일반적인 사랑의 정의를 넘어서 철저하게 그리고 획일적으로 이루어지는 감성의 메마름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다. 「타락론」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 전쟁이 아무리 처참한 파괴와 운명으로 인간을 사로잡으려 해도 인간 자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전쟁은 끝났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중략) 단지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의사도 성녀도 타락한다. 그것을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럼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인간은 살고, 인간은 타락한다. 그 진실 이외에 인간을 구원할 편리한 첩경은 없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타락하는 것이며 살아 있기에 타락할 뿐이다. -147p

  「타락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언뜻 「타락론」을 읽어보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 긴장된 문장의 흐름이 약간은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2차 대전 후에 패망한 조국 일본을, 천황을 배신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증오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신이 속한 일본 열도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하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황폐한 도시의 풍경처럼 사람들의 모습은 충격과 실망에 따른 일그러져 가는 군상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카구치 안고는 그들에게,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기운 내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작품 속에 심어 두었다. 그 때는 타락마저도 존중 받아야 할 하나의 인습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카구치 안고는 말했다. ‘현실을 모사를 표방하는 사실주의 문학은 문학의 표현 수단인 언어의 특권적 효과를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현실 모사를 위해서라면 그림이나 사진 등이 훨씬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언어 표현의 특권적 영역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공상의 세계이다.’

  작가의 세계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사실주의라는 언어 본질의 창의적인 영역에 제한을 두었고, 장르의 구분이 없이 환상이나 추리 영역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바람 박사」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등을 읽어본다면 매우 독특한 그의 장르 파괴 소설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나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는 한 여인에 대한 남자의 무한한 사랑에의 욕구 표출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현실 반영의 리얼리즘을 무시한 것이 아닌 좀 더 넓고 다양한, 그래서 매우 이색적인 근대 일본 문학을 만나볼 수 있었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은 그 시대가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제국주의라는 지울 수 없는 치욕과 설욕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나, 작가는 일본이 자신의 조국이기에 패배의 어두운 그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속에서 고독을 찾고 허탈감으로 얼룩진 절망과 인간의 타락을 운운하는 것이 그 때의 그들로선 최선이지 않았을까? 마지막 역자와 작가의 가상 인터뷰를 읽으며,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와는 동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 불명한 의지의 투영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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