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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박목월.박동규 지음 / 대산출판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 ‘나그네’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시를 외우게 하셨다.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 돌이켜 회상하면 그 때의 혹독한 훈련이 얼마나 귀중한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내가 ‘박목월’님의 「나그네」를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도시에서 자고 나라 나에게 고향이란 아련한 존재는 없다. 문득 이 시를 조용히 읊어보면 고향이라는 친근한 이미지가 촘촘하게 각인된다. 국어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나그네’가 깊은 추억 한편에 자리해 있었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한국 시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음에 나에게 박목월 시인은 그저 「나그네」와 함께, 국어시간에 달달 외워야 했던 교과서의 주인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유명한 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침범하면서, 그 분의 진정한 문학가로서의 묘미를 깨우쳤다. 그리고 박목월, 박동규 두 부자의 끈끈한 결속과 참다운 믿음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저 감사함에 목이 메어오는, 언제나 그리움과 죄송함 사이에서 코끝이 찡해지는 부모와 자식. 세상이 끝날 때까지 되 물림 되는 그 인연의 고리가 얼마나 귀중한 인연인지, 단단한 바탕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박목월 시인과 그 분의 장남 박동규님의 공동 저작으로, 평생을 문단에 몸을 담은 참다운 필력으로 가족사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시인의 문장은 가슴이 배어 나갈 듯 사무쳐오는 성찰의 미학을 깨우친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모두들 어렵던 50-60년대, 그 시절 고단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의 교육과 부인의 건강을 걱정하며,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는 가장의 어깨는 바위를 올려놓은 듯 무거웠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을까. 대가족을 이끌고도 시인은 모든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다감하고,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들 또한 아버지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올곧게 자라나긴 마찬가지다.
한 편 한 편, 날짜가 적힌 그 날의 기록을 읽어나가며, 마치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기분이 묘했다. 아주 사소한 것에도 감사함을 알고, 감사하고자 노력했던 한 가족의 단란함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대화들…. 애써 화려하게 채색하지 않고도 참다운 문장의 힘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분들의 삶의 단편을 그려 넣는다면 아마도 뽀얀 안개 빛으로 물든 낡은 노트를 산처럼 쌓아 올릴 수도 있으리라. 쌓이고 쌓인 겹겹의 세월이 지난날의 나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는 나의 아버지는 박목월 시인처럼 다정다감하고 친근한 분이셨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내가 갖고 싶다는 물건, 내가 배우고 싶다는 것은 모두 해주고 싶어 하셨다. 지금도 그 때 필름처럼 찍어둔 기억의 현상으로 가끔 아버지를 불러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오지만, 박동규님의 추억 속에 자리한 아버지의 기억처럼 영원히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설명하려고 애써도 부족하고, 아무리 표현하려 애써도 부족한, 그저 운명보다 더욱 진하게 맺어진 일평생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인생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