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세계의 만남 -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
제리 벤틀리 지음, 김병화 옮김 / 학고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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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에 모 학회의 송년 임원회의에 초대를 받아 여행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다녀온 해외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오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앙코르와트, 이베리아반도, 아나톨리아반도, 발칸반도,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동유럽까지 모두 여섯 차례의 해외여행 가운데 제일 심혈을 기울여 여행기를 썼던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문명의 충돌에 두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충돌한 현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은 711년, 지금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던 우마이야왕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이 아랍인과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연합군을 이끌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한 이래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왕과 카스티야의 이사벨여왕의 기독교 연합군이 그라나다를 함락할 때까지 무려 781년 동안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협력과 충돌을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를 돌아보면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세력들이 남긴 찬란한 유물과 그 안에 숨겨둔 놀라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여행경험은 문명의 충돌현장을 찾는 여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문명의 충돌현장은 종교적 배경이 서로 다른 문명의 세력다툼으로 변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리는 제리 벤틀리교수의 <고대 세계의 만남>은 ‘교류사로 읽는 문명이야기’라는 부제처럼 종교가 다른 문명이 만났을 때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하와이 대학의 역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역사적인 문화 간의 상호 영향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만, 문명 간의 교류는 어느 시기부터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에서는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문화 간의 만남의 역동적인 모습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명 출신의 사람들이 만날 때 일어나는 문화적 효과에 주목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접촉하면서 갈등을 빚고, 타협을 하며 때로는 개종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때 개종을 촉발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강력한 지원 없이 종교적, 문화적 전통만으로는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앞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문화전통들이 폭넓은 절충주의적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역시 타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개종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절충주의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는 이질적인 문화 전통의 틀 속에 기성의 신념과 가치 및 관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그 과정에서 팽창주의적 전통도 외국 땅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절충주의란 문화적 타협으로 나가는 대로(大路)라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의 만남>은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 ‘문명들의 조우’에서는 우선 만남을 정의합니다. 두 번째 장 ‘고대 실크로드의 세계’에서는 기원전 2세기 무렵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 한제국으로부터 인도의 마우리아제국, 중동의 파르티아제국 그리고 서쪽 끝으로는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를 통하여 이동한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세 번째 장 ‘선교사와 순례자의 세계사’에서는 서기 600년부터 1,000년까지를 배경으로 동쪽 끝으로는 당제국, 그리고 중동에서 북부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세력을 펼친 아랍제국, 그리고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제국과 북유럽의 카롤링거왕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문명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네 번째 장 ‘유목제국의 시대’에서는 서기 1,000년에서 1,350년까지 동쪽 끝으로는 원제국으로부터 차카타이한국, 일한국, 그리고 유럽 동부에 접근한 킵차크한국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유목민족들이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한 시기의 문명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 ‘세계의 질서를 향하여’에서는 1,350년에서 1,500년에 이르기까지로 동쪽 끝에는 명제국이, 인도에는 무굴제국이, 중동에는 사파비드제국이 그리고 아나톨리아반도로부터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오스만제국이 차지하던 시절의 문명의 특성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개종(改宗)이라는 단어는 “한 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바꿈”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종이라는 단어는 개인적 경험, 즉 개인 영혼이 나아갈 방향이 재정립되는 것, 낡은 가치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체계로 전환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이와 옮긴이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신앙과 가치가 문화 간 경계선을 넘어가서 서로 다른 문명의 사람들에게서 충성심을 얻어 내고 생소한 문화 전통에서 개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한계는 어디였을까?(17쪽)”라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즉 특정 집단에서 대규모적으로 발생한 개인들의 개종으로 새로운 문화 전통이 자리하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을 확대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근대 이전에 사회적 맥락에서 일어난 문화 간의 개종을 분석해보면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압력에 의하여 유도된 개종, 동화를 통한 개종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자발적 제휴를 통한 개종이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편인데, 대체로 근대 이전의 시기에는 문화적 경계선을 오가면서 장거리교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처럼 정치적․경제적․상업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자발적 제휴에 의한 개종의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경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지만, 개인을 위협하지 않고도 조세나 재정지원, 혹은 신분 등에서 차별하거나, 종교행사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종교시설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의 경계를 넘어 신념과 가치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절충주의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실크로드의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때 중국 토착의 도가사상을 비집고 들어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불교는 도가의 용어와 사상을 마음대로 빌려 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부전이나 삼신각은 인도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토착신앙을 받아들임으로서 신도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교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기독교이지만 로마제국 초기에는 교세를 확대하기 위하여 이교도의 문화를 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교적 가치를 수용할 여지를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이교 영웅들의 특질을 기독교 성인들과 결합시키고 이교도 신을 기념하는 날을 기독교 축일로 정하여 이교의 전통을 흡수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입니다.


총론에 해당하는 문화간의 만남에 대한 설명에 이어 다룬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적 교류의 설명에서 주목할 점은 고대 실크로드시대에는 세 가지 차원에서 문화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차원은 중국, 인도, 근동, 지중해지역 등 유라시아 전역의 정착 농경문명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명에 일관성을 부여할 신앙과 가치체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각각의 문명권에서 성장한 문화적 전통이 해당 지역의 국제도시에 유입된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대안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규모 개종이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문화적 교류를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차원은 상인들의 역할입니다. 문화권을 넘나드는 상인들은 자신의 토착문화전통을 이주한 도시로 가져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문화적 전통이 이주도시의 엘리트층의 관심을 끌게 되면 개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시대를 통하여 명멸한 제국의 문명을 설명하는 가운데, 기독교, 불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등의 발전과 쇠퇴과정을 흥미롭습니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 인도는 브라만교 중심사회였는데,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에 머물던 사회가 교역과 상업중심사회로 변환이 되면서 도덕과 윤리적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사제계급이 주도하는 비교(秘敎)적 제례중심이던 브라만교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브라만 사제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상인들과 연대하여 호혜적 공생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초기 불교의 교리는 단순하였지만, 오히려 다른 종교의 도전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는 아쇼카왕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면서 불교는 폭발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불교가 상인들과 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따라 다른 문명권으로 확산되는 기회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에 자리잡기까지는 무려 50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유가와 도가의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부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자발적 개종이 시작되면서 중국사회에 불교가 확산될 수 있었습니다.


3세기에서 9세기에 이르는 동안 인도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많은 인도의 승려들이 중앙아시아 국가나 중국으로 여행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역으로 불교가 시작된 인도를 찾아 원천교리를 배우려는 승려들의 발길이 잦아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혜초스님이 인도를 방문하고 그 여행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11세기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목제국들이 이슬람을 바탕으로 유라시아대륙을 석권하면서 이슬람교가 부상하고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인도에서도 불교가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힌두교의 전통으로 흡수되면서 인도의 불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이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에서도 당제국 시절 불교가 탄압을 받기도 했으며, 송왕조에 들어서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살아나면서 불교의 세력도 퇴조하였습니다. 반면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문명에서는 불교가 꽃을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몽골제국에 이어 중동지역을 차지한 오스만제국이 아랍의 이슬람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으면서 이슬람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꾸준하게 확장을 하게 됩니다. 아랍지역은 물론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까지 중심종교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절충주의적 특징때문에 토착 문화전통과 병행할 여지가 컸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지역에서는 기존의 문화적 전통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화적 대안들이 절충적으로 뒤섞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의 그림자극에는 힌두교의 서사시를 담고 있으면서, 시바와 비슈누에 바치는 주문이 알라에 대한 기도와 함께 읊기도 하는 것입니다.


15세기를 중심으로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5세기 동안의 발전과정을 토대로 예측해본다면 이슬람에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5세기가 흐른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근대 이후 기독교국가의 적극적인 선교에 힘입어 기독교의 비중이 가장 크고,이슬람이 뒤를 잇고 있으며, 인도대륙에 국한되어 있는 힌두교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불교는 그 세가 많이 떨어지는 편입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 간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좁혀져 종교적 특징 이외에 권역을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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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건네는 인사 - 감춰져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새롭게 읽기 ㅣ 두 번째 티켓 5
정희정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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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양은 몰라도 6대주는 발자국을 찍어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행일정을 만들다보니 5대주에 있는 나라들은 적어도 하나씩은 다녀왔지만, 호주는 남겨두고 있습니다. 20여년 전에 호주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퍼스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비용이 해결되지 않아 못 같던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한번 꼬이면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호주와의 인연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호주가 그리 가깝지도 않으면서도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가보고 싶은 호주를 속속들이 소개한다고 해서 <호주에 건네는 인사>가 반가웠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호주는 시드니와 맬버른 등 동남부가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호주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는 10개 도시를 찾아,  그 도시들의 형성된 배경은 물론 그 지역의 관광명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단순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담은 여행서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맬버른과 시드니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갈등 같은 것도 흥미로운 정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나라건 지역 간의 미묘한 갈등은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정치인들이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부각시켜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여행지에 관한 정보(제가 말씀드리는 정보에는 숙소나 교통편에 관한 것은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잘못된 정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와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 하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제 경우는 가급적이면 줄이려고 합니다만, 이 책의 저자는 참 적당한 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지의 분위기를 잘 전할 수 있는 정도의 사진도 돋보입니다. 인터넷에 넘치는 여행기를 보면 사진만 늘어놓고 설명은 없거나 두어 줄 정도 달고 있어 무었을 말하는 사진인지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저자는 유럽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호주대륙에서 살던 원주민, 에버리진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책의 영어제목을 <Say Palya to Australia>라고 했는데, 팔랴(Palya)는 에버리진의 말로 안녕, 잘 가, 고마워 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호주정부가 오래도록 유지한 백호정책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호주사람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여전히 앙금처럼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영어권 국가에서 온 학생은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하는 반면, 동양에서 온 학생은 부당한 차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유 없이 시비를 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먼 선조가 유럽에서 끌려온 죄수였거나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호주사람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자는 이 책에 담은 열 곳을 모두 직접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브리즈번에 있는 그리피스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304일 동안 호주에 체류했다고 합니다만, 열 곳을 여행하느라 소요된 시간은 물론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혹은 현지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을 계산하면 호주에 있는 내내 호주여행에 관한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학교에 출석은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든 저자의 가상한 노력이 담긴 <호주에 건네는 인사>가 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담은 에버리진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마음도 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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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길이 만나는 곳 ㅣ 세계신화총서 10
샐리 비커스 지음, 강선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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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리스신화는 다양한 형식의 유럽예술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해석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탓인지 이해되지 않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연작에서도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런 의문이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 [북소리]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설화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샐리 비커스의 소설 <세 길이 만나는 곳>을 소개합니다. 오이디푸스신화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생긴 책읽기였습니다. 언젠가 치매학회에서 재미있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커다란 검은 상자를 비추면서 과거에는 치매 전체가 비밀에 싸여있었는데, 많은 연구를 통하여 그 상자를 열었더니 여러 개의 작은 검은 상자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치매에 관한 더 많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학동네의 세계신화총서의 하나로 소개된 <세 길이 만나는 곳>은 52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영국의 늦깍이 작가 샐리 비커스의 소설입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작가의 역량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책소개를 통하여 오이디푸스신화를 재해석한 이야기라고 알았던 것인데, 막상 첫머리에서 프로이트의 말년이 등장하여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 플로이드일까? 아마도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창시한 인연 때문인 듯합니다.


프로이트는 예순일곱이 되던 1923년 구강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받았고, 이후 16년에 걸쳐 33번의 치료를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라듐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암의 원인이 되었을 시가 피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강암 치료는 수술로 암을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환자가 시가를 계속 피운 탓인지 암이 계속 재발한 것을 보면, 림프절에 전이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3기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강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수술과 방사선치료법이 발전하였음에도 수십 년 동안 별로 개선되지 않아 50% 정도에 머물고 있는데, 3기가 41.3% 그리고 4기의 경우 26.5%에 불과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는 장수한 셈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도 소포클레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재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였지만,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고 테베로 입성하는 것까지만 전하는 신화도 있다고 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아버지 라이오스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겼습니다. 젊은 시절 라이오스는 피사의 펠롭스왕에게 의탁한 바 있는데,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에게 반하여 그를 테베로 데려왔습니다. 크리시포스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하자 라이오스는 그를 목졸라 죽였고, 펠롭스는 라이로스를 저주하기를 ‘너는 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한 것이 신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들이 지나치게 인간사에 개입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인간의 염원이 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 신탁을 구하는 과정을 보면 알고자 하는 것을 적어 예물과 함께 신전에 바치면 피티아라고 하는 여사제가 신에게 물어 답을 얻었다고 합니다. 피티아는 월계수 아래 앉아서 신탁을 전하는데, 신이 접근하면 월계수의 이파리가 떨린다고 합니다. 문제는 필요한 경우에 조작이 가능하였고 당시 많은 사제들이 타락해 있어, 적당한 뇌물로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65쪽)


<세 길이 만나는 곳>은 프로이트가 구강암으로 처음 치료를 받던 1923년 4월 20일 빈의 병실로 찾아온 테이레시아스(델포이의 사제이며 오이디푸스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 증인으로 나옵니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두 차례의 만남 이후에 15년을 건너 뛰어 1938년 9월 8일 런던의 한 병원에서 재회하면서 본격적으로 오이디푸스신화를 설명합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가운데 만남이 성사되는 것을 보면 꿈속이거나 환상 속의 만남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통하여 정신분석학을 틀을 세운 프로이트인 만큼 꿈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장례식 직전의 만남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적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현실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깜깜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생각할 것이 많을 것 같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세 길’은 그리스 포키스 지방에 있는데, 테베로부터 오던 길이 파르나소스산 부근에서 두 길로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한쪽은 델포이를 향하여 북서쪽으로 뻗는 가파른 골짜기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파르나소스 산의 기슭을 감싸며 다울리스의 비옥한 평원을 향해 동쪽으로 휘어진다고 합니다. 갈라진 길이 등장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납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길은 모두 같고, 모든 길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지나가지게 되는 것(46쪽)’이라고 테이레시아스는 전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폭력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부당한 일도 저지른다고 비난합니다. 반면 프로이트는 ‘신’이란 건 자연의 부당함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원시적 욕망이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부분을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비해서 읽으면 잘못은 라이오스가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물론 그의 네 자녀까지 저주에 휘말려야 하는 것은 신의 부당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원시적 욕망으로 본 프로이트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서 불과 3일 만에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품에서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메로페에 입양되어 성장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신탁을 듣고는 왕궁을 떠난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세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론이 기본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탁의 오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오이디푸스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가정환경과 그가 라이오스에게 신탁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테이레시아스는 폭력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정부를 끌어들인 후에 집을 떠나 델포이로 가서 사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테베에 왔다가 델포이로 돌아가는 길에 델포이로 신탁을 구하러 가는 라이오스를 만나게 됩니다. 라이오스는 길을 걷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라이오스가 구한 “만일 내가 자식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83쪽)”라는 질문을 받은 것은 테이레시아스였습니다.


순간 테이레시아스가 뇌리에 떠올린 것은 세 갈래길에서 만난 라이오스가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연상은 자연스럽게 폭력을 당한 젊은이가 지팡이를 빼앗아 마차에 탄 라이오스를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으로 이어졌고,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는 직감이 휘딱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오스왕이여. 당신은 아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아들은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다.(84쪽)”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신탁인 것처럼..... 피티아는 곁에 있었지만 격렬하게 떨리는 월계수가지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청년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전을 찾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구하는 장면도 적절하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즉 아폴론이 신전을 떠나고 없는 시기라서 피티아가 쉬는 날이었음에도 신탁을 구하려는 코린토스청년 즉 오이디푸스에게 답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려했던 것인데, 오이디푸스가 순응하지 않자 끔찍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티아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합니다. 피티아가 사라진 다음에 테이레시아스는 고향인 테베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분명치 않은 듯합니다. 라이오스가 델포이에 갔던 것은 아들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테베의 골치덩이가 되고 있는 스핑크스에 관한 답을 구하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신탁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오이디푸스와 만나 죽임을 당했던 것인데, 신탁의 선후가 다소 모호한 것 같습니다.


라이오스 사후에 집정관에 오른 이오카스테의 남동생 크레온은 스핑크스를 처치한 사람에게 테베의 왕위와 이오카스테와의 혼인시킨다고 공표합니다. 그런데 이오카스테는 남편 라이오스가 죽고 재혼을 하는 마당에서 아들과 재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확인해볼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그것도 네 자녀를 낳을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생후 3일된 아들과 헤어졌으니 얼굴로 알아볼 수는 없었겠지만 신탁을 고려한다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니면 오히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탁이 내려진 이유가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살해한 것이었던 것을 보면, 라이오스는 미소년에게 더 관심이 많은 남색취향이었기 때문에 이오카스테는 그런 남편에게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임신을 기피했던 것은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이미 받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스를 취하게 한 다음에 관계를 맺어 오이디푸스를 낳은 이오카스테의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아들 낳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테베의 왕위가 끊어질 위험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탁의 위험을 알면서도 신에 도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오카스테는 신탁이 아폴론의 것이 아니라 사제로부터 들은 것이고 알고 있었고, 자식을 바라는 자신의 바람을 거부하려는 라이오스의 핑계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았을 때, 해결방안을 묻기 위하여 델포이에 신탁을 물으러 크레온을 보낸 이유도 의문입니다. 당연히 오이디푸스가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델포이의 신탁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이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테이레시아스도 그 점을 지적합니다. 오이디푸스왕이 직접 신탁을 구했더라면 다른 해결책을 들었을 수도 있었고, 같은 해결책을 다르게 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크레온이 가져온 신탁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테이레시아스 역시 오래 전에 해결된 일을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해나갑니다. 자신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났던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참이 아닌 거짓은 받아들일 수 없는 순수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자고 싶거나 아비를 죽여야 할 욕망 같은 것은 애시 당초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불행은 알려고 하지 말아야 했던 진실을 알려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안락함보다는 진실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신과 델포이의 신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저의 오해가 풀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탁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만 신탁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탁이 완성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치명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즐겨보고 있는 <쓸쓸하고 찬란하神(신)-도깨비>에서 신이 전하는 “운명은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갈라진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라 갈라지기 전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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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모르고 공부하지 마라 - 1등급을 만드는 자기주도학습의 힘
권승호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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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업무를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와의 인연이 참 질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부와 관련된 책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부도 모르고 공부하지 마라>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권승호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공부 제대로 하는 법을 담았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입시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므로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읽어 가다보니 그 옛날 선생님들께서 강조하시던 말씀도 있을뿐더러 변한 세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공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에 옮기느냐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현장을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요점 같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남들이 한다고 무턱대로 따라하는 것은 틀림없이 실패를 불러올 것입니다. 질병의 치료마저도 개인별 특성에 맞추는 맞춤의학시대인 만큼 공부 역시 개인의 특장을 잘 살린 맞춤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권승호선생님은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모두 6개의 범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공부를 잘하기 위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건강한 신체에 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근본적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마음가짐을 다잡는 준비가 필요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효율적인 학습방법’입니다. 저도 무작정 읽고 외우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공부도 요령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 요령을 정리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어휘력과 사고력이 중요하다’입니다. 맡고 계신 국어와 한자 부문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만, 사고력은 수학과 과학 등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주도학습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송아지를 물까지 끌고 갈 수는 있습니다만, 물을 먹는 것은 송아지 하기에 달렸습니다. 공부도 남이 대신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남의 머릿속에 쑤셔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는 공부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수업 시간, 이렇게 하라’입니다. 옛날 생각을 해보니 수업을 빼먹기도 했습니다만, 빼먹은 수업을 따라가려면 열배 아니 백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은 맡으신 수업에서 최고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다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부모와 교사, 이렇게 하라’입니다. 물론 공부는 학생들이 하는 것입니다만, 부모와 선생님들이 많이 격려해주고 도와주면 공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좋았습니다만, 특정인을 짚어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적은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재임하고 계실 때는 독단적인데다가 남을 배려하지 않는 독설에 사람들이 지쳐갔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누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가르치기보다는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 지를 가르쳐 스스로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맞춤공부에 앞서 누구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은 물론 따라야 하겠습니다. 1. 사교육을 당장 그만 두어라, 2. 11시 30분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라, 3. 스마트폰을 해지하라, 4. 일요일은 하루 종일 쉬어도 좋으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자기주도학습을 하여라 등 네 가지가 기본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목숨걸고 공부하지만 생각과 다른 결과를 손에 쥐면 누구나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공부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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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요즈음 대학에 다닐 무렵 만든 진료봉사 동아리의 40년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었을 때의 정신을 40년 뒤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온전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사물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생각도 시대정신에 맞추어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과정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 때부터 기록을 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주었지만, 학교 사정 때문에 동아리방을 몇 차례 이전하는 가운데 많은 기록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활동했던 회원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회원들과 회원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를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문화사학자이자 디지털 콘텐츠 큐레이터인 애비 스미스 럼지의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는 이런 저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라지고 없을 때 디지털 기억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가’로 이해되는 이 책의 원제목 “When we are no more: How digital memory is shaping our future”에는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의 기억이 미래에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담았습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개인 기억의 용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기억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디지털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옛말대로 저자 역시 그 답을 과거로부터 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불멸의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기억은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혹은 집단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적어도 인간의 영적 불멸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류가 처음 개발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방법은 구술입니다. 구술방식의 전승은 일단 인간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구술내용의 정확도라거나 구술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등, 여러 제한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의 ‘외주화’가 가능해지면서 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외주화’는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외부 장치에 위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그림이나 기호로 표시되던 것이 문자를 발명하면서 기억의 보존이 보다 효율화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기록문화는 기원전 3,000년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수메르 문명이 남긴 것입니다. 그들은 갈대줄기(스타일로스)를 이용하여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겼습니다. 기원전 2,400년 전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두루마리 종이를 이용하였으며,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100년 무렵 양피지를 개발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 무렵 골편에 기록을 남긴 흔적이 있고, 기원전 800년에는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글을 적고 가죽끈으로 이를 묶어 보관하는 죽간이 등장했으며, 기원전 105년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였습니다. 채륜의 종이는 당시 사용되던 제지술을 개량하여 다량생산이 가능한 근대적 방식을 적용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문자의 발명에 이은 종이의 발명은 기억의 외주화에 두 번째 혁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혁신은 인쇄술의 개발입니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만, 금속활자를 이용한 서책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야말로 기억 외주화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할 만합니다. 디지털기술의 발전에 따른 정보저장의 획기적인 확대는 네 번째 혁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디지털 기록과 인간의 기억이 결합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고 디지털이 주도하게 될 앞으로의 세계에서 인간의 기억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기획은 저자가 근무하던 의회도서관이 1억번째 소장품을 들인 것을 기념하여 1997년 개최한 기획전이었다고 합니다. 전시된 물품 가운데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을 마련하고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등이 교정을 본 <독립선언문>의 초고가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여행에 지쳐 전시물에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휘적휘적 지나치던 관람객들이 진한 검은색 잉크로 줄을 좍좍 긋고 행간에 휘갈겨 쓴 글씨를 알아보려고 전시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자는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50년 아니 200년 뒤에는 무엇을 전시하게 될 것인가. 실체가 없는 디지털 자료로 되어 있는 과거를 미래의 인류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큐레이터로서의 고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디지털 기억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책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성이 다소 산만한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자는 아직도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작은 걸음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저 과거와 미래라는 기억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책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기억의 심원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이 지점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억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지식공유를 위한 기술과 맞물려 인간의 잠재력을 확대해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디지털시대 기억의 풍요를 제어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직면하게 될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선택을 고민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기억의 ‘외주화’가 발전해온 네 가지의 혁명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자는 외주화된 기억, 즉 정보의 혁명을 주도했던 네 차례의 변곡점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는 메소포타미아의 글자 발달로, 이는 행정과 상업, 수집품의 전문적 관리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두 번째는 고대 그리스의 도서관 발달로, 이 도서관들은 지식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을 육성하는 장소였습니다. 세 번째는 르네상스시기에 일어난 그리스와 로마 문예의 부흥과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이들은 서구가 현대사회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18세기 계몽운동으로, 이는 지식을 행위 동사로, 즉 진보하는 것으로 개조하고 국가의 책임으로 정보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데까지 확대시켰다는 것입니다.


기억과 ‘외주화’된 기억, 즉 정보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9개의 장으로 구분한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디지털 기억시대의 도래에 따른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과연 디지털 기록이 인간의 기억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설명입니다. 디지털기억은 개인을 둘러싼 인적 물적 자원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족, 친구들과 더 빠르게 연결되고 다양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이 너무 적은 것 못지않게 해롭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곡된 정보를 걸러낼 수 있어야 하고, 폭주하는 정보들 가운데 필요한 것만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이런 과정이 번거로워 정보의 취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매사에 긍정적인 듯합니다. 인류문명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처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디지털 세계에 적응하는 세 가지 방식을 설명합니다. 첫째, 과거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더 많이 배우며, 둘째, 자연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데이터 세계를 조직하고. 셋째, 암기와 검색과 회수에 관한 업무를 우리보다 뛰어난 기계에 위탁하고, 기계중심세계에서 번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서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기억으로부터 조립하는 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분량의 디지털 기억을 검증하여 객관적인 사실로 정제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2장으로부터 5장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인류의 기억이 탄생하는 순간으로부터 기억을 보존하는 기술이 발전해온 단계를 설명합니다. 물론 아담과 이브를 인용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만, 저자는 4만년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의 정신활동을 물리적으로 기록한 것을 기억 외주화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정교하게 그려진 짐승과 새의 그림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인도네시아 등의 동굴벽에 남아 있습니다. 그밖에도 조개, 뼈, 금속, 상아 등으로 만든 장신구와 악기, 주물 등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시절 만들어진 도서관은 단순하게 책을 보관하던 장소가 아니라 배움과 학문의 전당이었습니다. 즉, 기억의 보관과 확산을 주도하는 중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실물 도서관 이외에도 기억술을 개발하여 기억의 궁전이라는 가상도서관에 정보를 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문자의 발명이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문자의 발명으로 그것을 배워서 쓰는 사람의 정신에는 망각이 자라날 것이다. 그들은 기억하는 훈련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2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크라테스의 경고는 기우에 불과하였습니다. 기억을 외주화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생물학적 기억은 작은 규모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디지털 정보를 검색하는 기술에 의존하여 기억하기를 소홀히 하는 우리 역시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6장에서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외주 기억의 폭증을 다루었습니다. 지식을 소외시키고 ‘우리의 외부로’ 내보냈기 때문에 생긴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저자는, 우리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내주고 그 대가로 외부 세계에 대한 어마어마한 통제력을 얻어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도덕적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음입니다. “현대문화 속에서 가장 강력한 가치의 보고는 흔히 도덕 가치의 담론과 거의 연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과학] 지식이다(230쪽)”라고 한 역사학자 스티븐 섀핀의 말은 음미해볼만 합니다.


7장과 8장에서는 기억의 생물학을 설명하였는데 기억이 드러내는 과거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감정은 이성을 좌우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뇌가 더 많은 정보를 수용하려고 애를 쓰는 만큼 새로운 정보에 폐쇄적이게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은 경험의 축적이기도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기억이 세계를 ‘정확하게 그러하게’ 기록한다면 상상은 기억을 핵심적인 ‘마치 그러한 것처럼’으로 바꾸고, 경험을 추정으로 변형한다.(271쪽)”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미래를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상상력보다는 경험에 더 의존하게 되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배제하기 위한 생존전략 때문일 것입니다. 상상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9장은 기억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저자의 조언을 담았습니다. 책을 적지 않게 읽고 있는 저도 최근에 실감하게 되는 문제입니다만, 기억에 저장되는 정보의 내용보다는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을 기억하려 애쓰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옮긴이가 요약한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정보 인플레이션’ 속에서 우리가 처한 위기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디지털 기억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와 그 디지털 기억의 소유권과 관리의 의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두 가지라는 점이 해결해야할 숙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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