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 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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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보스턴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적에 시간을 쪼개서 보스턴 시내의 명소를 걸어서 돌아보았습니다. 코플리 플레이스의 학회장에서 시작해서 올드 사우스교회, 보스턴 커먼, 그래너리 묘지, 킹스 채플, 옛날 주의사당, 올드코너 북스토어를 거쳐서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보스턴 티파티에 이르기까지 보스턴 역사에서 한 몫을 한 장소들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80647).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전철을 타고 보스턴 미술관으로 이동해서는 전시된 작품의 감상을 마치기까지 거의 여섯 시간을 강행군한 것입니다. 그동안 편하게 앉아 다리를 쉰 시간이라고는 간단한 점심을 먹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9810).

 

미리 예정한 일정이 아니라서 운동화를 미리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두를 신고서 오래 걸었던 탓인지 귀국한 다음날 시작한 무릎통증이 고질병이 되어 지금도 걷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이 닿는 곳으로 나서곤 하던 주말걷기도 어쩔 수 없이 쉬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은 유독 주말 날씨가 참 좋아서 주말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억울함을 삭이곤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걷기는 벌써 7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말에 다녀온 곳을 블로그에서 소개하다보니 소문이 났던지 월간지에서 걷기를 예찬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6544). 걷기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노릇이지만 막상 글로 옮기려니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걷기 좋아하시면서 좋은 글을 남긴 분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107>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고 시작하는 브르통교수님의 <걷기예찬>은 여기에 더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 산책에 나섰던 것이 모 일간지에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코스를 매주 소개하는 것을 보고 따라 걷는 것으로 발전하고, 아예 그런 코스를 엮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5144>이라는 책을 사서 완주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한강변을 따라서 100km의 거리를 다섯 번에 나누어 걷는 코스들 입니다. 평균적으로 20km를 다섯 시간 정도에 걷도록 되어 있습니다. 100km를 완주한 다음에는 더 긴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생겼는데, 생각의 나래는 제주의 올레길을 넘어,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에까지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에서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 Tiago, Way of St. James),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에서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오늘날 순례길이 생겼다. 절대 만만한 코스가 아니며 프랑스 남부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가로지르는 800km 여정. 한 달을 꼬박 걸어야 한다. 연금술사의 파올로 코엘료가 걸어 더욱 유명해졌다.”

 

직장에 메여 있어 아무래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언제가 될지 몰라도 꼭 가보겠다는 생각만 해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긴 여행을 하는 경우 여행지를 직접 돌아보면서 감동을 얻는 것도 특별합니다만, 사실 저는 그 여행을 준비하면서 현지의 모습을 수도 없어 머릿속에 그려보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최근에 우연히 정인홍교수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적은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50186>걸음 다가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문에 듣기로는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한국 사람들을 제일 많이 만나게 된다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다양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스페인 국경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인홍교수님은 ‘산티아고 가는 길’의 안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걸으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오감을 통하여 느낀 것을 단순하게 기록하기보다는 그가 가진 풍부한 인문학적 재료와 섞어서 더욱 풍성해진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전하는 이야깃거리를 더욱 쫄깃쫄깃하게 만들기 위하여 인용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를 제일 먼저 맛보기로 했습니다.

 

<순례자>는 <연금술사로>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의 첫 번째 작품인데 198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걸은 느낌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례자>의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에 붙인 원주에 “내가 순례하던 그해에는(1886년) 산티아고 순례자들이 연간 4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2005년의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매일 4백명이 넘는 순례자가 이 글에 나오는 바 앞을 지나갔다고 한다.(341쪽)”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도 “<순례자>를 읽고 나는 언젠가 ‘산티아고의 길’에 가리라 예감했고, 또 그러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길을 걷게 되었다. ‘산티아고의 길’은 내게 ‘모비 딕’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꼭 해내리라 다짐하는 그 무엇. <순례자>는 내게 생의 시간을 여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상상도 못 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라고 적은 아마존 서평처럼 코엘료의 <순례자>가 산티아고 가는 길을 홍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순례자>는 람(RAM)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언어의 구전에 기반을 둔 비밀스런 종파에서 활동하는 저자가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나선 산티아고 순례를 통하여 삶의 신비를 깨우치는 훈련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은 혼자서 걷거나 혹은 가까운 사람끼리 동행하기도 합니다만, <순례자>에서는 순례길에서 저자의 깨우침을 도와주는 인물로 페트루스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단체가 실존하는가 하는 문제나 저자가 깨우치려는 것이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저자에게 소개하는 단계별 훈련방식은 충분히 의미를 새겨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정진홍교수님께서 눈보라 속에서 피레네 산맥을 오르면서 자신도 모르게 북받치듯 눈물이 났다고 적은 것을 읽었던 기억때문인지, 코엘료 역시 “생장피에드포르와 가까운 한 마을의 폐허를 걷다가 갑자기 강렬한 마음의 동요에 사로잡히면서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33쪽)”고 적은 부분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정진홍교수님이 코엘료의 <순례자>가 남긴 암시의 영향을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티아고 가는 길’이 남자의 눈물을 끌어내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남자의 눈물이 금기였을 조선시대에도 연암 박지원선생이 삼류하를 건너 요양의 백탑이 멀리보이는 탁 트인 요동벌판에 서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고 하셨다니 ‘산티아고 가는 길’과 요동벌판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페트루스는 코엘료에게 람의 의례를 순서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듭남을 익히는 ‘씨앗훈련’, 평소 무관심했던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속도훈련’, 자신에게 관대해지도록 하는 ‘잔인성 훈련’, 자신을 돌보는 사자(使者)를 만나게 해주는 ‘사자의 의식’, 직관을 깨어나게 하는 ‘물의 훈련’, 아가페의 의식인 ‘푸른 천체 의식’, 죽음의 두려움을 일깨우는 ‘산 채로 매장당하는 훈련’, 주위로부터 기를 끌어오는 ‘람 호흡법’, 나쁜 결정을 인식하는 ‘그림자 훈련’, 삶이 매순간 우리에게 주는 조언을 들을 수 있는 ‘듣기 훈련’, 의식을 거행할 때 쓰게 될 ‘춤의 훈련’ 등입니다. 이와 같은 훈련은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기억하면 좋은 습관 같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순례자에게 산티아고 길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순례를 시작해서 하루면 넘을 수 있는 피레네 산속을 일주일에 걸쳐 걸을 때 페트루스가 순례자에게 건넨 말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거듭남의 행위와 관련된 매우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처한 겁니다. (…)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사물의 아름다운 면만 보게 되고 살아있음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언제나 사람들은 성지 순례가 계시에 이르는 가장 객관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가고, 구하는 자에게 삶이 관대하게 베풀어주는 수많은 축복을 답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죠.(51쪽)”

 

‘산티아고 가는 길’처럼 출발점에서 목적지가 정해진 코스를 걷다보면 미리 정한 일정에 맞추려 노력하거나 아무래도 목적지를 염두에 걷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걷기가 고행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트루스가 전한 람의 의례 가운데 ‘속도훈련’이 순례길에서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느리게 걷는 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십니까? 느리게 걸으면 고행으로만 느껴지던 걷기가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순례길에 숨어있는 메시지를 발견해냈다는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정진홍교수님이 바람부는 벤토사의 한적한 길에서 바람과 풀이 사랑하는 듯한 모습을 읽은 것처럼 말입니다. 김수영시인의 <풀>에서 모티프를 얻은 듯합니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정진홍교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풀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길가의 풀들이 바람 속에 누웠다 섰다를 반복하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풀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우리는 바람과 다툰 적 없어요. 우리는 바람과 싸운 적 없어요. 바람은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우리는 바람을 사랑해요. 바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늘거리며 춤출 수 있겠어요. 사람들은 꼼짝도 않는 우리를 죽었는 줄 알거예요. 그래서 뿌리째 뽑아버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바람 덕분에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알잖아요.’(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141쪽)”

 

코엘료가 순례길에서 만난 어떤 상인은 “순례는 성자들이나 하는 거요.(135쪽)”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코엘료 역시 람이라고 하는 비밀종파의 마스터가 되기 위하여 산티아고 가는 길을 따라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상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꼭 성자나 교인이라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걷는다>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걷기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치유활동”이라고 한 것처럼 그저 걷기에 좋다면 걸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에베레스트 산에 최초로 도전했던 미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가 “산이 그곳에 있어 오른다(Because it is there)”라고 말한 것처럼 “그곳에 길이 있어 걷는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코엘료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순례에서 얻은 ‘자신의 검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내 검의 비밀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는 모든 성취의 비밀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었다. 검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것이었다.(313쪽)” 그런데 검을 가지고 할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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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 사월의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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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 연재하고 있는 북리뷰 코너에서 소개할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응용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의학 분야에서도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대세라는 점을 고려한 까닭입니다. 물론 덕분에 저도 인문학에 대하여 공부해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과학인문학’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기도 했지만, 책을 모두 읽고서도 과연 저자는 ‘과학인문학’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안개 속을 헤매다 나온 기분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읽다보면 ‘과학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작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만, 제목과는 달리 똑 떨어지는 정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의가 없으니, “그런데 과학인문학은 그 길들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이성’의 길들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117쪽)” 이나 “우리는 객관적 지식을 잃지 않으면서 과학을 ‘세속화할’수 있을까요? 사실상, 과학인문학의 모든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172쪽)”라는 저자의 주장이나,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마침내 이성의 지배와 더불어 자연이 도래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성의 지배에 대한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마침내 자연이 사라집니다. 나는 내가 오늘날 과학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자연이 없기 때문이요, 우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다시금 무한에서 유한으로, 혹은 무한에서 다수성, 복합성, 연루된 것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234쪽)”라는 저자의 설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도식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나는 분명히 특정한 과학이나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과학과 기술을 역사, 문화, 문학, 경제,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가르칩니다. 다라서 내가 말하는 ‘과학기술’은 학생들이 겁내는 과학기술, 미디어가 대중에게 제시하는 과학기술과 거의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20쪽)”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저자가 말하는 과학인문학의 정체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저자는 과학기술주의자들의 “다행스럽게도 과학은 정치의 관심사, 분쟁, 이데올로기, 종교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과학의 권위는 다른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율적입니다. 바로 여기에 과학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자율적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효과적입니다.(21쪽)”라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과학기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두 번째 편지에서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는 모토가 나온 겁니다.”(76쪽)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학문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소위 학문의 ‘통섭’ 혹은 ‘융합’을 논하게 되면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향은 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사실 과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게 되는데, 사유를 통하여 자연의 법칙을 구하던 철학적 접근 방식을 탈피하여 근거를 바탕으로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과학이 분리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이 결여된 과학이 위험하다는 인식에는 공감하는 바가 있으나,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점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결국은 주간 북리뷰에 소개할 다른 책을 읽느라고 부산을 떠느라 생각도 못한 곤경을 치룬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과 이 책을 다시 읽는다고 저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첫 번째 편지에서 적은 것처럼 저도 일찌감치 수강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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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진화하게 하는가 -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람과 기술의 콜라보레이션
스티브 발머 외 지음, 서울디지털포럼 사무국 엮음, 방영호 외 옮김 / 알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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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람과 기술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무엇이 우리를 진화하게 하는가>는 2012년 열린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연사들이 발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04년 처음 시작하여 지난해에 9회째 열렸던 서울디지털포럼은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혁신을 이뤄낼 영감을 공유하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된 비영리 목적의 국제 포럼이라고 합니다.

 

TIME(Technology, Information, Media 그리고 Entertainment)산업과 주요 글로벌 이슈를 토대로 주제를 선정하고 세계 정상급 연사들을 초청하고 있는데, 초청연사들은 범세계적인 지식혁명과 산업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계의 리더들이 미래를 읽는 혜안을 공유함으로써 이 시대의 지식격차를 해소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2012년 제9회 서울디지털포럼은 ‘공존-기술, 사람, 그리고 희망’이라는 주제로 열렸다고 합니다. ‘공존’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최근 국내외로 화제가 되고 있는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이 떠오릅니다. 공존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주택에 사는 윗층 사람은 심야시간에는 생활소음을 줄이는 배려를 한다거나 아래층 사람 역시 자신도 다른 아래층에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 어쩔 수 없는 생활소음은 이해하는 아량을 베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도 저도 싫으면 공동주택이 아니라 생활소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고립주택으로 이사를 가면 될 일입니다.

 

이 책의 편집을 맡은 윈드호스 인터내셔널의 CEO 머렐라 크리스투우는 ‘90퍼센트를 위한 기술’이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세계 상위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부자들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상위 10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90퍼센트 사람들이 기술이 주는 이점을 누릴 때 비로소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11쪽)”고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포럼에서는 사회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만들고 인간 삶의 질을 궁극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적정기술’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5년 후에는 나머지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대기업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것으로 믿는 필자는 멀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세 가지의 특징을 소개하였는데, 첫째는 ‘나머지 90퍼센트 고객을 위한 비즈니스’이고, 둘째는 ‘기술의 소형화’와 ‘저가화’이며, 셋째는 ‘디지털 혁명’이라고 합니다.

 

모두 스물세명의 국내외 연사들이 발표한 내용이 ‘기술과 사람이 함께 가야 할 길’, ‘스마트 사회의 새로운 기회’, ‘넘쳐나는 정보의 무한한 가능성’, ‘놀이와 예술이 공존하는 콘텐츠의 미래’, ‘속도와 진정성이 공존하는 세상’이라는 5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날로그 세대에 가까운 저는 그럭저럭 따라가 보려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빠르게 변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의 그림자마저 붙드는 일도 힘겨운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디지털 세계의 실체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특히 버너 보겔스 아마존닷컴 부사장이 소개하는 빅데이터의 세계는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는 현대과학은 현재 제4 패러다임 단계에 와있는데, 제1 패러다임에서 과학은 경험을 통해 증명이 가능했으며, 제2 패러다임에서는 과학이 이론으로 증명될 수 있었고, 제3 패러다임에서는 컴퓨터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증명하였는데, 제4 패러다임에 이른 오늘날 과학은 주변에서 관찰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연자들이 공존을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이번 포럼이 공존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터인데, 주최측이 그 동안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비기술적 개념의 주제를 선정한 이유를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라는 시대적 물결이 디지털 분야에 쪽에도 일종의 반성과 새로운 미션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과연 약속한 대로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고 있는가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앞서 층간소음문제를 인용했습니다만, 우리 모두 같이 사는 세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절실하다는 느낌이 드는 시점에 적절한 주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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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생명의 위기와 대안적 성찰 생명문화총서 3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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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주말 늦은 시간에 방영되는 <인간의 조건>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잘나가는 개그맨 6명이 현대 문명의 혜택 없이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밀착하여 관찰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입니다. 파일로트 프로그램 성격으로 방영될 때의 주제는 “휴대전화, 인터넷 , tv없는 생활”이었는데, 유선전화를 활용하면서 같이 지내는 멤버들 사이의 관계가 끈끈해지는 모습을 시청하면서 저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정규방송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인간의 조건>은 “쓰레기 줄이기”를 첫 번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한 일상의 모든 쓰레기를 줄이는 생활에 들어가기에 앞서 보여준, 여섯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배출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은 어느 사이 우리들 삶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편리한 생활의 부산물로서 다소 불편함이 있는 과거의 생활로 회귀하게 된다면 대폭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을 예측해 봅니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의 자원낭비를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하다보면, 급증하고 있는 인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지구자원을 고갈시키고 종국에는 지구를 황폐화시켜 생존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는 비관론자들의 주장에 이르게 됩니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제45대 미국 부통령을 지냈고, 2007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앨 고어 전 미국 대통령이 출연했던 영화 <불편한 진실; http://blog.joinsmsn.com/yang412/6680385>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하여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는 생활이 몸에 익힐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요즈음 같은 동절기에 실내온도를 2도 낮추고 여름철에는 냉방온도를 2도 높이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양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엘 고어의 환경보호운동은 영화 이외에도 저술활동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의 선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94488>에서는 재생에너지 개발, 생태복원, 에너지 소비혁명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앨 고어는 “나는 우리의 손안에 기후 위기를 서너 번 정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전 세계인의 단합된 의지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기후 위기가 전 지구적인 비상사태임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점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우리의 선택, 13쪽)”고 인류적 사고의 변환을 촉구하는 한편, 탄소배출의 주범인 몇몇 거대 석유회사, 자동차 회사, 석탄회사, 선탄을 태우는 회사들이 연합하여 기후위기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기후 변화의 과학적 증거를 기만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앨 고어의 말대로 과학적 증거에 기반하고 있다는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을 들으면 지구의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낙관주의자들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에 읽은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에서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환경오염의 문제 혹은 자원고갈의 문제는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에 불과하여 조만간 해답을 찾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인류가 경제성장이라는 어리석은 목표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들의 “후퇴하라는 거짓 경보에 속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지구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비관론자들과 낙관론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이들의 주장을 같은 거리에 두고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머리에서 <인간의 조건>을 인용한 것은 최근에 읽은 엘리자베스 파렐리교수의 책 <행복의 경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88622>와 맥이 통하는 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운전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사며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고 지나치게 많이 버린다. 아이들과 나 자신을 지나치게 방임하며 산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물과 에너지, 공기, 공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즉, 나란 존재는 지구가 내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인다.(7쪽)”는 파렐리교수의 자가진단은 편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한편 파렐리교수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지구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며,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환경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는 파렐리교수의 제안에서 ‘과학을 넘어 종교와 철학에서 길을 찾다’는 부제를 단 <생태 생명의 위기와 대안적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서강대학교 생명연구소에서 나온 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환경의 위기를 과학이 아닌 종교와 철학에서 대안을 찾아 해결하려는 책의 기획의도가 적절한 것일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저의 생각의 단순함 때문일 것 같습니다.

 

편집을 맡으신 김완구님은 (환경의) 오염방지 및 정화기술 등과 같은 과학기술이 환경문제들을 즉시에, 일시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눈에 띄게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개발해온 과학적 기술은 긍정적 가치와 부정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양면성을 가지는 만큼, 과학을 넘어 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한 반성과 전환을 요구하는 종교적이고 철학적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나 정복자로서 단순히 자연을 수단으로 여기고 이용해 먹는 존재라고 보는, 이른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인간은 이제 자연의 일부인 자연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혹은 자연과 하나로서 자연에 본래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보는 생태중심적 사고로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인식 아래, 1부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종교적 논의를, 2부에는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습니다.

 

종교적 논의는 가톨릭, 동학, 불교 그리고 유교적 관점에서의 논하고 있습니다. 심상태교수께서 논하신 가톨릭 관점에서의 논의에서는 그동안 인류가 직면한 환경위기의 사상적 바탕이 서양의 종교적 전통에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위한 해결책을 다시 성서 안에서 발견해보려는 하고 있습니다. 즉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짐승을 부려라”는 구절이 세계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것 같은 인상을 주어 근세 이후의 서구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성서의 전거에 입각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성서의 표상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가 ‘착취의 지배관계’가 아니라 ‘관리적 지배’의 성격을 지닌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연세계는 하느님이 관리를 위탁한 것으로서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관리해야 할 실재이다.(63쪽)”라는 것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톨릭의 새로운 해석입니다.

 

표영삼 천도교 상주선도사께서 논하신 동학(東學)적 관점에서는 동학의 생명관을 바탕으로 환경파괴에 대한 오늘의 문제점을 개관하면서 ‘온 천지 생명체계로 돌아가 한 몸처럼 되자’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가르침을 통해 정신적 의미의 세계를 넓혀나가면 환경과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인간 조건에는 결핍성이 있으므로 물질적 만족은 한도가 없다. 물질적인 세계에 갇히지 말고 무한한 의미의 세계를 넓혀 나가야 한다. 온 천지 생명체계와 하나 될 때 거기서 얻어지는 의미의 세계는 무한하다. 정신적 의미의 세계를 넓힐 때 진정으로 세상을 만날 수 있다.(80쪽)”고 하였습니다.

 

유정길 사무국장님이 논하신 불교적 관점에서는 환경문제를 진보라는 인간의 집단적 관념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고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 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라는 사고가 바로 진보적 사고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보이는 것만이 존재의 전부라는 사고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재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내용으로 합니다. “세계는 제석천의 그물망처럼 구슬 하나하나에 전체가 비춰 있어, 하나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83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세계가 서로 연관 맺으며 순환하는 이치를 무시하고 직선적인 시간관, 직선적인 발전, 직선적인 세계관이 바로 근저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태학에서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이 파괴된 자연을 회복하는 운동과 나아가 자연을 파괴한 인간에 대해 새로운 변화, 새로운 가치관 각성 운동, 생활양식 전환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종교의 역할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최영진 교수님이 논하신 유교적 관점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주역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나’를 규정할 때 나에 대립하는 존재, ‘너’를 타자(他者)로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을 ‘인간’에 대립하는 타자(他者)로 구성합니다.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물(物)’이라고 지칭하는데, 설괘전 3장에서는 하늘, 땅, 산, 연못, 우레, 바람, 물, 불 등 여덟 가지 사물, 즉 기본존재들이 상호작용하여 자연을 구성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과 연못은 기를 통하고, 우레와 바람은 서로 부딪히고, 물과 불은 서로 쏘지 않으나 팔괘가 서로 착종된다.(天地定位 山澤通氣 雷風相薄 水火不相射 八卦相錯, 116쪽)] 유교에서도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남을 얻어 가장 귀하다.’고 하는 인간우월주의에 대한 이론 보완이 필요할 것이라 정리하고 있습니다.

 

2부에는 김완구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상임연구원이 쓴, ‘환경철학과 윤리에서의 생명’과 ‘인간과 자연: 큰 자아실현과 다중심주의’, 김성한 숙명여대 교수가 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그리고 정민걸 공주대학교 교수가 쓴 ‘환경갈등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환경문제에 대한 철학적이고 윤리학적 접근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태와 개별 생명체에 대한 본래적 가치를 어떻게 따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생태계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여 비교할 것인가 하는 등,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사안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문에서 “지구온난화문제나 새만금방조제 건설사업 그리고 4대강 살리기 사업 등의 환경쟁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낙관론과 비관론이 늘 병존하기도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막상 필자들의 논의에서는 해당 문제들에 부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인식을 숨기지 않고 있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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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 정진홍의 900킬로미터
정진홍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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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소위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은 걷는 사람들에게는 꿈의 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무릎부상으로 꽤나 오래 쉬고 있습니다만, 주말마다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다는 코스를 따라 걷기에 나서면서 언젠가부터 저 역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말걷기를 같이 하는 아내와 함께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정진홍교수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는 얼마 전에 참가한 예스24의 파워문화블로그 네트워크데이에서 온라인 네트워크의 독특한 경험을 소개하고 상품으로 받은 것인데,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한 걸음 떼어놓은 것 같아 마음이 흡족해졌습니다. ‘안주는 안락사다!’라고 늘 자신을 타이른다는 정진홍교수는 ‘그저 저질러보고 그저 남이 안하는 이상한 짓거리로 튀는 것’이 아니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안주하다보면 삶은 산소가 아닌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언젠가 질식사하게 되기 때문에 도전에서 나오는 산소로 자기 호흡을 할 수 있게 끊임없이 도전을 해야 했고, 산티아고도 그래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행은 현지에 가서 보는 것보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 더 즐겁고 흥분되는 것 같습니다. 현지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일정을 짜면서 머릿속에서 미리 코스를 따라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인데,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다고 해도 현지에서 일어나는 돌발상황 때문에 매번 일정을 조정하여 상황을 편하게 열어가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행문에는 이런 경험들을 담아서 같은 길을 따라 가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교수님은 산티아고로 가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그의 인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를 만들어냈다고 하겠습니다. 정진홍교수님의 인문학적 감성이 넘치는 글은 이미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시리즈를 통해서 흠뻑 빠져들었던 터라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에서는 독백하듯 풀어놓는 산티아고가는 길에 대한 그의 느낌을 오롯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은 ‘내 안의 까닭 모를 눈물’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남자의 눈물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닌데, 그것도 까닭모를 눈물이 쏟아지는 경험을 산티아고에서 했다면 그곳에는 아주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생장의 순례자사무소를 나서 눈보라속에서 피레네 산을 오르면서 저자는 “나도 모르게 북받치듯 눈물이 났다. 단지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내 속에 응어리져 있던 그 무언가가 분출하듯 쏟아진 것이었다. 오장육부의 속을 비집고 올라오듯 오래 묵은 내 속의 숙변 같은 눈물들이 솟구쳐 올랐다. 정말이지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토해냈다.(36쪽)” 뿐만 아니라 저자가 삼류하를 건너 요양의 백탑이 멀리보이는 탁 트인 요동벌판에 서서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라는 ‘호곡장론’을 남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인용하고 있어 다시 놀랐습니다. 남자의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우리 사회, 특히 조선사회에서 당당히 눈물을 논하다니 당장 열하일기를 읽어 연암의 호곡장론을 새겨보아야 할 것만 같습니다.

 

정교수님은 산티아고에서 보고 느낀 것을 단순하게 기록하기보다는 인문학적 재료와 섞어서 느낌을 더욱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교수님의 생각과는 다른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보아디어 델 카미노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들어갔더니 오히려 비가 개이고 머물을 뻔 했던 장소가 빗속으로 파묻히더라는 이야기에서는 대학신입생 때 홍도에 갔다가 태풍 빌리를 만났을 때 생각이 났습니다. 청명한 날씨였는데 태풍이 들이 닥친다하여 배를 얻어 타고 홍도를 탈출했지만 겨우 흑산도에 이르렀을 뿐 흑산도성당의 작은 방을 얻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꼼짝도 못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때 홍도에 남았던 사람들은 홍도에서 맞은 태풍의 경험이 특별하더라는 자랑이 많이 부러웠던 기억도 말입니다.

 

생장에서 피니스테레까지 900km의 거리를 걷는 다는 것은 걷는 순간 스스로의 깊이를 토해내고 자신만의 둘레를 드러내는 길을 오롯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저자의 고백에 제 마음도 벌써 산티아고 가는 길로 떠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가보겠다는 결심에서 이제는 한 걸음 정도 가까이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 남는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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