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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 - 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
브뤼노 라투르 지음,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 사월의책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매주 월요일 연재하고 있는 북리뷰 코너에서 소개할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응용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의학 분야에서도 인문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대세라는 점을 고려한 까닭입니다. 물론 덕분에 저도 인문학에 대하여 공부해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과학인문학’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기도 했지만, 책을 모두 읽고서도 과연 저자는 ‘과학인문학’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안개 속을 헤매다 나온 기분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읽다보면 ‘과학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작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만, 제목과는 달리 똑 떨어지는 정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의가 없으니, “그런데 과학인문학은 그 길들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이성’의 길들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117쪽)” 이나 “우리는 객관적 지식을 잃지 않으면서 과학을 ‘세속화할’수 있을까요? 사실상, 과학인문학의 모든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172쪽)”라는 저자의 주장이나,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마침내 이성의 지배와 더불어 자연이 도래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성의 지배에 대한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마침내 자연이 사라집니다. 나는 내가 오늘날 과학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자연이 없기 때문이요, 우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다시금 무한에서 유한으로, 혹은 무한에서 다수성, 복합성, 연루된 것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234쪽)”라는 저자의 설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도식들이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어떻게 뒷받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나는 분명히 특정한 과학이나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과학과 기술을 역사, 문화, 문학, 경제,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가르칩니다. 다라서 내가 말하는 ‘과학기술’은 학생들이 겁내는 과학기술, 미디어가 대중에게 제시하는 과학기술과 거의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20쪽)”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저자가 말하는 과학인문학의 정체가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저자는 과학기술주의자들의 “다행스럽게도 과학은 정치의 관심사, 분쟁, 이데올로기, 종교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과학의 권위는 다른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자율적입니다. 바로 여기에 과학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자율적이기 때문에 참이거나 효과적입니다.(21쪽)”라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과학기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두 번째 편지에서 “시간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간의 행위, 기술의 사용, 과학을 통한 경유, 정치의 침입을 구분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물질화는 사회화요, 사회화는 물질화다”라는 모토가 나온 겁니다.”(76쪽)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과학과 사회,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역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밀접해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학문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소위 학문의 ‘통섭’ 혹은 ‘융합’을 논하게 되면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향은 학문이 지나치게 세분화되어 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사실 과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 이르게 되는데, 사유를 통하여 자연의 법칙을 구하던 철학적 접근 방식을 탈피하여 근거를 바탕으로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과학이 분리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이 결여된 과학이 위험하다는 인식에는 공감하는 바가 있으나, “과학 없는 인문학은 개코원숭이들의 인문학일 뿐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지나친 점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가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결국은 주간 북리뷰에 소개할 다른 책을 읽느라고 부산을 떠느라 생각도 못한 곤경을 치룬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과 이 책을 다시 읽는다고 저자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첫 번째 편지에서 적은 것처럼 저도 일찌감치 수강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