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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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1906년에 발표한 6막 12장의 희곡을 각색한 것입니다. 2년 뒤 <파랑새>는 러시아 연극계의 거장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모스크바 예술 극장 무대에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현대연기론을 정립하여 연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의 <배우수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파랑새>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는 틸틸과 미틸남매를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는 아픈 딸이 파랑새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매는 할머니가 건네준 다이아몬드가 달린 마법의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나섭니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미래의 나라’ 등 남매는 사람들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가는 곳마다 우여곡절 끝에 파랑새를 만나게 되지만 파랑새들은 날아가 버리거나, 색깔이 변하거나 심지어는 죽어 버립니다. 결국 남매는 파랑새를 손에 넣지 못하고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남매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결국 파랑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희곡 <파랑새>의 작가 마테를링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 철학서 한 장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파랑새>에는 ‘죽음’, ‘행복’, ‘시간’, ‘운명’ 등이 의인화되어 등장하고, 남매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지하고 탐욕스럽습니다. 게다가 보기에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나무들’과 ‘동물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저자는 <파랑새>에 많은 상징과 비유를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비유 가운데서도 마테를링크가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바로 ‘행복’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박한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라는 빛의 요정의 말처럼 행복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파랑새를 빌어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오늘 소개하는 책이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정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물론, 러셀이 생각한 행복의 개념이 한 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도 같이 고민해보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경은 영국의 모머스셔 트렐렉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인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병사했고 18개월 뒤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개인교습을 통하여 교육을 받은 러셀경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굳어져 갔으며,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경험을 통하여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 그는 11살 무렵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지만,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는 증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하는 것임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지만, 졸업 후에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형이상학자 J.M.E.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잠시 관념론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3가지 주요목표를 추구했는데, 첫 번 째 목표는 인간지식의 겉치레들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줄이는 것이고, 2번 째 목표는 논리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것이었으며, 3번 째 목표는 논리적 분석이었습니다.(다음 백과사전, ‘러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0168b)

 

그러면 다시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만나보기 위하여 러셀경의 <행복의 정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복>은 크게 ‘행복이 당신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러셀경 답게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행복이 당신을 떠났다’라기 보다는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행복은 파랑새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요.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엔이 전 세계 158개 국가를 상대로 국민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47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1위는 영세중립국 스위스가 차지했다고 하네요(연합뉴스 2015년 4월 24일자 기사, “한국, 행복지수 158개국 중 47위…1위 스위스)” 그런가하면 유럽 신경제재단(NEF)이 148개국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의 결과에서는 부탄이 1위를 차지했는데, 우리나라는 68위에 머물렀습니다. 신경제재단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를 조사한 것과는 달리 유엔은 국내총생산(GDP), 관용의식, 기대수명, 정부와 기업의 부패 지수 등 5개 항목을 0~10점까지 점수를 매겨 합산한 결과입니다. 결국 조사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는 셈인데, 중요한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러셀의 접근 방식은 행복에 관한 파랑새 이론과 흡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이 당신을 떠나간 이유, 즉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아홉 가지나 늘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외부적 요인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논의대상에서 제외한 둔 것은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심리적 치유를 통하여 행복을 되찾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불행은 없는 법, 저자는 끊임없는 경쟁이야말로 불행의 근원적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물론 이어 나오는 단조로운 일상 때문에 불행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경쟁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사람들을 쉽게 지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경쟁이 습관화되면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부분에까지 침투하여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소비되는 재화의 수량이 증가할수록, 그 재화의 추가분에서 얻는 한계 효용은 점점 줄어든다.’라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행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로 즐거움을 얻게 되었을 때는 같은 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다음번에는 강도가 더 높아지거나 빈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행복에서의 한계효용체감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 버린다. 나는 극단적으로 자극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69쪽)” 결국 적절한 수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경쟁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일종의 연쇄반응인 것입니다. 걱정은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결과적으로는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이 가중되다 보면 경쟁 대상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질투는 행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도덕적으로 보나 지적으로 보아 나쁜 버릇입니다. 경쟁상태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축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질투라고 하는 소모적 감정에 빠지지 않는 좋은 방어수단입니다.

 

불합리한 죄의식 역시 사람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본의 아니게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경우 합당한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털어내지 못하게 되면 자존감이 손상되고 심하면 절망감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특히 종교인의 경우,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우 심한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쏟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피해망상이 심해지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나친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게 되면 해결방안은 쉽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사람이 느끼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행복 사이에는 중간 상태의 여러 가지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행복은 무엇일까요? “두 종류의 행복은 평범한 것과 엄청난 것, 또는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156쪽)”라고 변죽을 올리고는 이어서 “두 가지 종류의 행복이 가진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묘사한다면,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허용되는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데 있어 학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열정, 사랑, 노동, 관심, 그리고 노력 등이 행복을 제대로 느끼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하기 위하여 불행의 개인적 요소이면서도 심리적 요인이 아닐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문합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는 것, 생계유지에 충분한 소득을 유지하는 것, 처자식에 대한 의무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182쪽)” 등입니다.

 

이 책이 발표된 이후로 벌써 여러 세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관한 저자의 인식은 요즈음 사람들에게 바로 적용해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것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차이는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을 정의하면서 사랑에는 일종의 보호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큰 틀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지만, ‘사랑이 소유욕의 위장된 형태인 경우가 많은데, 상대에 대한 걱정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목적도 있다’라는 견해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그 여자를 지배하게 된다는 견해는 여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신여성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자유 때문에, 여성들은 어머니가 될 각오를 하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이제는 예전에 부모 노릇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단순한 기쁨은 사라지고 없다(208쪽)”라는 구절을 읽다보면 바로 지금의 시점에 꼭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가사에 전념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나,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최근에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저자는 행복이란 마치 무르익은 과일처럼 운 좋게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의 정복>에 담긴 행복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새삼스럽게 재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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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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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시작되는 노래는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거사실패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조시절, 무지렁이 백성들은 무슨 짓을 해도 꼼짝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층에 팽배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옛말처럼 순박한 것 같은 백성들도 궁지에 몰리면 수를 내게 된다는 것을 동학농민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극에 달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봉기가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이광제의 장편소설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다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고, 읽는 맛을 더하기 위한 약간의 픽션이 가미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도 봉기 전후의 긴박한 상황에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느낌이 절로 드는 실감나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담대한 사내라고 하더라도 대사를 앞두고는 심리적 갈등이 많았을 터이다. 작가가나라 없는 나라>를 통하여 묘사하는 전봉준 개인의 심리적 고뇌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에 더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임오군란의 실패로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나 있던 대원군과 전봉준이 만나 교감하는 장면이나,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하여 일본을 끌어들여 갑오경장 때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젊은 개혁파들의 행보가 과연 무엇을 지향하였는지 다시 새겨보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개혁도 나라가 있는 다음이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근대화된 일본에 매몰되어 일본의 시커먼 속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학군 역시 청국과 일본이라는 외국세력들이 반도에 밀고 들어오는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던 1894년 무렵이라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시민계급들의 고조된 인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을 터입니다. 급박하게 변하는 세상의 움직임에 조선의 지배계층만이 눈을 닫고 있었으니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백성들까지도 누가 도둑인지 알고 있는 마당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기댈 언덕을 찾아 우왕좌왕한 셈입니다.

 

과연 동학농민군은 대원위대감에게서 희망을 읽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보다 긴밀한 접촉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청국의 파병에 따라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허수아비로 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상황에 따라 동학군이 다시 세를 규합하여 서울로 향하는 과정이 보다 선명하게 그려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첫 대면에서 ‘나라의 명운이 그대들의 손에 달렸음을 명심하라. 조선의 마지막 기회니라(25쪽)’라며 기대를 품었던 대원군이었다면 전봉준과의 접촉을 보다 긴밀하고 은밀하게 가져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라 없는 나라>에서는 동학군을 이끄는 무리들의 최종 목표가 중앙권력을 나누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거병을 하면서 전봉준이 내세운 바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다고 밝혔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감추어진 진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는 합니다.

 

일본군이 뒤를 받쳐주는 관군에 밀려 결국은 패퇴를 거듭하는 동학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서 정보와 지리에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마무리를 싸움터로 떠난 정인의 생사를 뒤쫓는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도 아쉬운 점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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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 더 나은 삶을 위한
뤽 페리 & 클로드 카플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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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철학분야의 책을 소개합니다. 2002년부터 장 피에르 라파랭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프랑스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교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입니다. 뤽 페리는 알랭 르노, 질 리포베츠키 등과 같이 루이 알튀세르, 장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68혁명 세대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소장학자로서 주로 종교와 분리된 인문주의를 주창해 왔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은 철학 강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클로드 카플리에가 묻고 뤽 페리교수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철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는 어느 학문의 영역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는 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그 변화의 폭이 작은 것 같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게 변하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흥미진진한 사연, 그게 바로 철학의 역사다’라고 요약하고 있는 저자들은 역사를 통하여 철학의 흐름이 크게 바뀐 변환점에 따라서 철학의 흐름을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의 흐름을 구분하기에 앞서 저자들이 철학에 대하여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철학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나? 아직도 철학이 필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이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경제 전략에 지배당하는 이 시대(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술시대’)에, 인간이 바랄만한 ‘목적’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수단’만을 불려나가는 이 시대에 철학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6쪽)” 이 질문은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 철학자이자 언론인 장 프랑수아 르벨의 소책자 <왜 철학자들인가?>에서 제기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우선 ‘터무니없다고 할 수만은 없는 답이 존재한다’라고 변죽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합리적 사유라는 완전히 인간적인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하였는데 생각해면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눈 저자들은 ‘각 시대마다 전에 없던 실존적 관건들이 등장해서 철학자들이 기존에 널리 수용되었던 사상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7쪽)’라고 보았고, 당연히 그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철학자를 앞서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작업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충실히 보여주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확인하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8쪽)”라고 기대를 부풀리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역사를 읽어가다 보면 앞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다섯 시기를 각각 한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다섯 시기를 따라가기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아 ‘첫머리에’에서 철학의 대모험에 나서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첫머리에’가 이 책의 정수를 요약한 부분이라서 완독이 어려운 분들이라면 이 부분만 읽어도 저자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들은 우선 철학의 정체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즉, ‘철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뤽 페리는 철학의 정의를 논하는데 있어 우리의 삶이 도덕적 가치와 영적 가치(혹은 실존적 가치)라는 두 가지 가치영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영적 가치라 함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헤겔이 이야기한 ‘영(정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라 함은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하는 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잘사는 삶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가치에 따라 철학을 정의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철학사조들은 예외 없이 ‘좋은 삶’ 문제에서 정점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을 경유하고 신앙에 기대어 잘 살아보자는 것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사실 종교는 인간에게 ‘지고선(至高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시도라고 본다는 점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바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철학이 좋은 삶의 조건을 정의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와 공유할 바가 있지만, 자율적 이성과 명철한 의식으로 그러한 정의에 도달하려는 철학과 신에 기대려하는 종교와는 분명 차별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학은 종교가 아니라 ‘세속의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인간은) 뭘 하는 게 좋을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좋은 삶’이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죽음,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25쪽)”라고 철학을 정의한다고 읽었습니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으로서 ‘좋은 삶’을 정의하는 방식의 변화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이 매달려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다섯 가지의 대답을 내놓았다고 저자들은 정리합니다. 최초의 대답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이었고, 두 번째 나온 대답은 유대-그리스도교 원리를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답변은 르네상스의 등장과 더불어 인문주의에 기반하여 제시된 것이며, 네 번째 답변은 19세기 들어 부상한 해체의 원리에 기반하여 만들어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 들어 도래한 두 번째 인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원리로 도출한 ‘사랑’이 다섯 번째 답변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답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답변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새로 제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초의 답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도출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대에는 완벽한 삶이란 신적인 존재라야 가능할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신화로부터 철학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신들의 조화 속에서 인간들 역시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신화에서 합리적인 핵심들을 가져와 이론화된 철학적 지식을 만들어냈고, 플라톤은 인간이 경험해온 주요 영역들을 아울러서 처음으로 철학적 인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현상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우주론을 나름대로는 일관적으로 조화시켜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두려움이 지혜의 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남들을 사랑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삶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5세기 들어 몰락한 그리스 철학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개인적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끌어낸 우주적 조화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성(神性)으로 회귀하는 셈입니다. 나아가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을 통하여 인격화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초기의 모호한 신의 세계와는 차별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3대 유일신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이븐 시나와 아베로에스, 유대교의 마이모니데스, 그리스도교의 토마스 아퀴나스 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으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속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른 ‘좋은 삶’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그리스 철학보다도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노릇에 머물러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철학은 성서를 설명하고, 교회의 해석과 교호의 중요한 개념들에 주석과 논평을 다는 정도에서, 눈부신 신성,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 그리스도가 즐겨 사용했던 비유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에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삶의 의미를 코스모스나 신성에 두지 않고 인간에게,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방법론적 회의를 사유의 토대로 삼았던 데카르트에 의하여 기초가 탄탄하게 다져졌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던 데카르트는 과거로부터 온 것, 즉 선입견을 버리고 의식 외부 세계의 존재마저도 의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여겨서 내버리고, 그다음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신념에 남아 있지 않을까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45쪽)”라고 말했습니다.

 

저자들은 “르네상스시대에 문을 연 인문주의 초기에는 주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근거하여 철학․종교․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고, 그 후 데카르트를 거쳐 계몽주의에 이르렀으며, 칸트가 좀 더 견고한 토대를 닦았고, 마지막으로 헤겔과 마르크스가 집단적 역사의 법칙에 대한 사유를 전개함으로서 토대를 한층 더 넓혔다(164쪽)”라고 이 시기의 철학적 특성을 요약하였습니다. 새로운 철학의 지평에서 좋은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근대 인문주의는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첫째, 이 시각에서는 지식, 문화, 문명화․인간화 교육이 중요하다. 둘째, 문학이나 예술 쪽의 재능 또는 위대한 행위로 역사에 기여한 사람의 삶은 의미가 있다.

 

근대 인문주의는 인간적인 근거와 목표로 삶의 의미를 고찰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부여하는 획기적인 생각까지 끌어냈는데, 그럼으로 해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자유와 이성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었다(50쪽)”라고 저자들은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양된 인간 역시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좋은 삶을 고찰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것이 바로 해체의 원리를 적용하게 된 이유입니다.

 

해체의 원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동한 인문주의는 19세기에 영국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공화국 사상 등에 영감을 주었지만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종교나 인문주의의 원리에 기초한 이상들을 끊임없이 해체하려 들었다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의 족쇄에 묶인 인간을 풀어주고 지금까지 간과되거나 짓눌리고 억압당했던 실존을 다양한 차원으로 풀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그 사상가들 가운데 니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앞서 해체의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사유는 이른바 ‘계보학’, 다시 말해 우상들이 은밀히 전하는 허상들의 숨겨진 뿌리를 파헤치는 학문의 형식을 취합니다(52쪽).” 즉, 그리스의 우주론, 종교가 내세우는 영적인 삶, 계몽적 인문주의가 주장하는 해방된 인간 등을 허무한 것으로 치부한 니체에 따르면 이들은 이상을 명목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생의 심오한 가치는 ‘선악을 넘어’ 생의 강렬한 힘에 있다고 믿은 니체철학에서는 우리 안의 다양한 생명력들을 조화시켜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혁명’을 앞세운 두 번째 인문주의 시대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공포, 분노, 억울함 따위와 달리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잇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원리입니다.(64쪽)” 앙리 뒤낭 이후 현대 인도주의의 탄생과 발전에서 가까운 이들을 향한 사랑은 이웃사랑이 아니라 낯선 이까지 포함한다는 뜻에서 새로운 집단적 이상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새로 등장하는 화두이군요.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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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황소연 옮김, 김인곤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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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도 참 묘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최근에 서양 철학사를 정리한 프랑스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교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을 읽고 리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서양철학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정리한 서양 철학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전공하고 종합상사에 근무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오가와 히토시 박사가 쓴 <곁에 두고 읽는 서양 철학사>입니다. 공공철학과 정치철학이 전공분야이지만, 시민을 위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서양철학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라는 시작하는 글의 제목에서 벌서 저자의 집필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이 3천년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오는 것은 보편적인 내용과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리한 저자는 서양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앎을 추구하여 최고의 지혜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서양철학자들의 지혜를 배우고 익히면서 더욱 앎을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50명을 고르고, 각자의 철학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저자가 요약한 이 책의 얼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장은 그리스철학부터 중세 신학까지 다루고 있는데,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제목처럼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은 시기입니다. 2장은 르네상스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로, ‘나는 누구인가’,‘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풀려고 노력하던 시기입니다. 3장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대립에서부터 독일의 관념론까지 격돌하던 시기로서, 인간의 이성이 철저하게 탐구되었던 철학의 최고 전성기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4장은 19세기로부터 20세기의 독일, 프랑스 철학이 중심이 되던 시기로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인간의 삶을 화두로 삼던 시기입니다. 5장은 현대 사상의 주요개념을 개괄하는데, ‘세계를 움직이는 새로운 규칙’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6장은 사회와 정의를 생각합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를 구현해야 하는지, 과연 정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자가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50명의 서양 철학자를 골랐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철학자들에 더하여 인도의 아아르티아 센이 포함된 이유도 따로 설명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6개의 장에 배분된 철학자의 숫자도 차이가 있습니다. 뤽 페리교수가 서양철학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는데 있어 철학의 흐름이 커다랗게 변하는 변곡점으로 구분했다는 설명에 비하면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저자는 선택된 철학자의 대표적 개념을 설명하였지만, 사실상 철학적 개념이라고 보기 어려운 주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제일 먼저 언급한 소크라테스만 해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주제를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대화법을 적고 있습니다. 대화하는 방법은 철학적 개념이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뤽 페리교수가 신학을 철학의 범주에서 떼어낸데 반하여 저자는 신학 역시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도 중요한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신학을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뤽 페리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던 참이라서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다루었던 칼 포퍼가 빠지고 근래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마이클 센델을 고른 것도 과연 적절했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개별 철학자의 대표적 주제 두 가지를 5쪽 정도로 요약하고 있어 서양철학의 흐름의 가닥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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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스탈린 - 강철 인간의 태동, 운명의 서막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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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192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41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한반도를 양분한 것이나, 6.25동란의 발발과정에 간여하였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구를 지향한 공업화와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시켜 낙후된 소련의 사회구조를 개조시킴으로써 소련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지만,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공포정치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소련 사회의 구조개혁의 성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전후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배가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C. 터커가 스탈린을 20세기의 이반 뇌제(雷帝)로 묘사한 것은 25년여에 걸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철권통치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기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젊은 스탈린>의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1937~1838년 사이에 소련에서는 대략 150만 명이 총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직접 사형선고장에 서명한 것만도 거의 3만9천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스탈린의 지인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략 2,000만에서 3,000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스탈린을 ‘겨룰 자 없는 정치가, 편집증적인 과대망상가, 히틀러를 제외하고는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참상을 저지른 정신이상의 대가’였다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파국적인 성격은 대체적으로 성격형성기에 문제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출간된 스탈린에 관한 수천 권들의 저서 가운데 젊은 시절을 다룬 것은 극히 희소하다고 합니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새로 공개된 그루지아의 기록보관소에서는 ‘(스탈린)의 어린 시절, 혁명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 폭력단의 일원이고, 시인이고, 수습 사제이던 시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혈기방장한 연인의 남자. 또 사생아를 낳게 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저버리는 남자로 살아온 과정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줄 새 자료들(11-12쪽)’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젊은 스탈린>에서 기술할 내용은 스탈린의 성장과정에 대한 진짜 기록을 밝히는데 두었다고 했습니다. 스탈린 숭배나 반스탈린 음모론의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은 원본 그대로의 기록을 다루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젊은 스탈린 주변에 모여든 캅카스인 남자들의 폭력성과 부족주의는 라트비아, 폴란드, 유대인 심지어는 러시아인들에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갱들의 전쟁, 부족들 간의 경쟁, 민족학살을 함께 겪고, 동일한 폭력의 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즉 스탈린을 형성한 것은 비참했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한 것이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소련을 형성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라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의 성립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였음에도,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유럽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메테우스의 낭만적 환상과 완고한 역사적 유물론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195-196쪽, 열린책들,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행태에서 이들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말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공산당 조직가들이 주도한 반파시즘 시위에서 조직가들은 사람들을 내보내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게 하고는 자신들은 카페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이름으로 죽게 만들고 뒤따르는 이익을 거두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면서 영국사람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토니 주트와 티머니 스나이더 지음, 20세기를 생각한다 113-114쪽, 열린책들, 201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04215) 초기의 레닌주의에 매료되었던 지식인들도 1936년 스탈린의 시범재판이나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보고서는 소련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레닌의 손에서 왜곡된 마르크스를 구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이의 연계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과 1917년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1905년 굴욕적인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에 300년 이상 지속된 로마노프왕조의 실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는데, 평화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였고, 시위대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으로 맞대응하면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시베리아철도 주변 부대의 부대들이 반기를 들면서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것으로 철도와 군대를 다시 장악하고 혁명을 수습했습니다.

 

이렇게 구성한 의회도 걸핏하면 해산시키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고,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러시아군이 보여준 무기력함에 더하여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1917년 3월 8일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고 대다수의 수도경비대가 여기에 동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를 결정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넘어갔습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소비에트는 소련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6월 16일에는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사회혁명당이 최다석을 차지하였고,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습니다. 7월에 케렌스키를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좌익의 탈퇴로 내분에 빠졌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10월 24~25일(신력 11. 6~7) 사이에 봉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다음백과, 러시아혁명;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0215a).

 

다시 <젊은 스탈린>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볼세비키혁명의 과정이나 이념적 배경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스탈린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도 혁명 이전의 행적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탈린에게 영향을 미친 캅카스의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보았던지 프롤로그에서는 1907년 6월 26일 지금의 그루지아공화국의 수도인 트빌리시의 중앙광장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29살의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강탈한 돈은 레닌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카자크, 은행 직원, 무고한 보행자 등 40여명이 사망했고, 스탈린은 뻔뻔한 은행강도, 살인자, 해적, 방화범 등으로 점철된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젊은 제화공 베소 주가시빌리와 예카테리나 케케 겔라제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스탈린의 두 형은 홍역 등으로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 베소는 알콜중독에 빠졌습니다. 어렸을 적에 소소라고 불렸던 스탈린이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베소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주교가 되기를 바란 케케는 소소를 성직자의 자녀만 입학할 수 있는 교회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비밀이라고 하네요. 교회학교에서 소소는 공부를 잘하는 합창단 소년인 동시에 길거리의 싸움꾼으로, 반쪽은 옷을 잘 입은 마마보이이며 나머지 반쪽은 부랑아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성과 형편없는 처신, 열정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타고난 영리함과 거만함이 교대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신중했지만, 화가 나면 잔인해졌고 마구 욕을 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107쪽)” 다른 사람보다 잃을 것이 없었고 감정적인 애착대상이 별로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전교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인 소소는 그림, 연극, 합창 등 다양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1890년 1월 6일 합창단원들이 교회 밖 행사에 나갔을 때, 통제를 잃은 마차에 소소가 치어 큰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베소가 등장해서 소소를 자신이 일하는 구두공장에 도제로 등록시켰습니다. 물론 케케가 후원자들을 동원하여 소소를 다시 교회학교로 돌려놓을 때까지 힘겹게 일하면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에 헌신한, 스탈린이 직접 노동자로 일한 유일한 경험이라고 합니다. 베소의 납치사건 이후로 소소는 폐렴을 심하게 앓았고, 학교에서도 점점 반항아로 변해갔습니다.

 

교회학교를 졸업하고 소소는 뛰어난 성적으로 트빌리시의 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 무렵 트빌리시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소소는 금지된 사회주의문헌을 읽는 비밀 독서회에 가입하였고, 결국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봄에는 신학교 밖으로 몰래 나가 철도노동자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낭만적인 시인이었던 스탈린은 ‘반쯤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독실한 광신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무렵 형성된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만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도록 역사가 정해 놓았다. 인류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회주의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시련과 고난과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섭리에 따르는 이러한 진보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곧 일반 대중이다. 그들의 해방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촉매제가 된다(148쪽)”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결국 소소는 신학교를 떠나게 됩니다.신학교를 떠난 소소는 기상관측소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급진적인 성향의 동료들을 모아 조직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트빌리시의 헌병대 장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등 직업적인 비밀 투사의 길을 밟아 갑니다. 그리고는 파업을 선동하고 시위와 파괴를 주도하면서 경찰과 헌병대의 감시를 받고, 체포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몸을 피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붙잡혀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내 탈출해서 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합니다. 1905년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대회에 참석할 캅카스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국의 수도에서 레닌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양쪽 부모가 모두 세습귀족인 레닌은 볼품없이 생겼지만 그의 삶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대한 광신적인 헌신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이때 만난 레닌에 대하여 “‘입만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토록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지성의 힘과 완전한 실용성의 융합이었다.(287쪽)”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이후 스탈린은 레닌에게 경도되어 갔고, 스탈린의 강한 추진력에 매료된 레닌 역시 스탈린을 중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후계자로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스탈린 역시 모든 활동의 중심에 레닌을 두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스탈린>을 통해서 저자가 밝히고자한 것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성장배경에 더하여 러시아제국시절부터 운용해온 비밀경찰들의 은밀한 활동으로 어느 조직이나 배신자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단호하게 쳐내는 전략을 구사해야만 했던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탈린의 그런 냉혹한 성격은 수없이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맺고 상황이 바뀌면 관심을 두지 않은 데서도 읽혀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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