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에듀 2016 - 2016 대한민국 교육계를 뒤흔들 13가지 트렌드
이병훈 교육연구소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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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 수 있다면 과연 좋을까요?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알게 되면 피할 수 있을까요? 다양한 점술에 기대는 것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래가 궁금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점술이 아닌 과학적 분석방법에 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만들어낸 영역이 소위 ‘트렌드’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말연시가되면 마치 토정비결을 보듯이 사회변화나 경제활동 등에 관한 트렌드를 예측하는 책들이 꾸준하게 나와 독자들의 관심을 끌더니 이제는 다양한 영역에서 트렌드를 예측하는 책들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나온 것들을 몇 가지 챙겨보면, IT&테크, ICT, 빅이슈, 경제전망, 제테크, 건설, 소비, 모바일, 20대, 라이프, 등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트렌드를 예측하겠다고 나선 것들을 보면 그만큼 예측이 어렵기 때문에 독자층이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누구나 예측가능하다면 굳이 트렌드 예측서가 인기를 끌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트렌드 에듀 2016>은 교육분야에서의 트렌드 예측서입니다. 이병훈교육연구소에서 내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연구소가 ‘국내 최고 교육학습 전문기관’이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학부형들에게 인기가 많은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트렌드서의 일반적인 공식에 따라서 2015년 교육 트렌드를 돌아보고, 2016년 교육트렌드를 13개의 부문으로 나누어 전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난 일을 분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예측하는 것보다는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에는 인성교육, 소프트웨어, 중국, 양극화 등이 화두가 되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향도 등장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선 공부-후 진로’에서 ‘선 진로-후 공부’로, ‘선 글로벌-후 코리아’에서 ‘선 코리아-후 글로벌’의 경향이 등장했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2016년에는 여전히 인성교육, 코딩, 중국, 아날로그 교육, 거꾸로 시킨 교육, 자유학기제 등이 화두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대입이 인생을 가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한 까닭인지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 과목에서 대입에 관한 예측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고등학교가 대학 입시를 결정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도 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교육이나 내 아이가 갈 수 있는 최고의 대학은 어디인지도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인재들이 의과대학으로 몰리는 경향이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학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화수분이 될 무언가를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분야의 사회적 여건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결국 개인의 앞날 정도만 만족시키고 있는 셈인데, 문제는 그마저도 어려운 국면으로 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의학 이외의 분야에 미래를 걸어 볼만한 분야는 무엇인가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성교육이 밥상머리에서 시작한다는 저자의 생각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들이지 않는다는 우리네 옛말이 있습니다만, 즐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밥먹는 시간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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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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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체크 체크리스트 등 전작을 통하여 꾸밈없이 진솔한 글에 공감을 해온 아툴 가완디의 신작이었기에 선택한 책이었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면서도 언급하기를 회피하는 주제임에도, 솔직하게 접근하고 있는 점에 크게 공감하게 됩니다. 가완디 다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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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품격 -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빌 게이츠 선정 올해의 추천도서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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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시간보다는 살아온 날을 곱씹어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삶을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반환점을 돌던 무렵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보니 ‘삶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서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입니다.

 

산업화 시대와 달라진 정보화 시대의 신흥 지배 엘리트를 분석한 책 <보보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삶이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었던 저자는 <보보스>에서 자신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조망한 바 있습니다. 그 역시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함보다는 내적으로 풍요한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먼저 인간이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소개하고, 과거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극복하고 도덕적 삶을 추구하던 사회가 이제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성공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모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또한 그런 변화가 초래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다시 과거의 전통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명제를 각각 <인간의 품격>의 맨 앞과 맨 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저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 인물 아홉 명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자에게 영감을 준 아홉 사람은 빈민운동가 도러시 데이, 작가 새뮤얼 존슨, 성 아우구스티누스, 미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인권운동가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킨, 전 미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 소설가 조지 엘리엇 그리고 전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 등입니다.

 

서구사람들은 기독교적 전통적으로 겸양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삶을 중시해왔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부닥친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가치관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해야 하는 삶의 방식에 회의하게 되었고, 전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삶을 즐기자는 풍조가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정도가 지나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보고 있고, 적어도 일정 부분은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간단한 실험자료를 보더라도 이런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1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에게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물었는데, 12퍼센트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9년에 같은 질문을 받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 가운데 남학생은 80퍼센트, 여학생은 72퍼센트가 자신을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때문인지 기독교에도 역시 변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시대로부터 인간은 나약하고 결함투성이인 존재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고 세속적인 성공을 거부하며, 신의 은총을 믿고, 분에 넘치는 신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도덕적 실재론의 전통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는 도덕적 실재론이 물러나면서 변화가 일고 있다고 합니다. 휴스턴의 조엘 오스틴 목사는 ‘더 나은 자신이 되라’라면서 “신은 당신을 평범한 사람이 되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현 세대에 자취를 남기기 위해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29쪽)”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 승리하며 살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하라고 권유한다는 것입니다. 시류의 변화에 편승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기는 보수적인 가톨릭이 교리의 해석을 교황청으로 일원화하는 것과는 달리 진보적인 기독교에서는 성직자마다 자유롭게 교리를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겸양을 바탕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결함을 찾아 고치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과거의 겸손의 미덕을 ‘리틀 미(Little me)’라고 한다면 자아도취적 심리에서 스스로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기과잉시대의 미덕을 ‘빅 미(Big me)’라고 저자는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빅 미(Big me)’의 풍조는 여성해방운동이나 소수자 인권운동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권익을 찾아주는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자아도취적 사고가 만연하게 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성공지상주의가 확산되면서 남이 하는 모든 일을 나도 이룰 수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무한경쟁이 촉발된 것입니다. 스스로를 다스려 내적 진실성과 도덕성을 높이는 일에는 관심이 멀어지면서 타인의 지탄을 받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온고지신(溫故而知新)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옛 것에서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낼 수 있기에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아홉 사람이 살아온 삶을 간략한 전기형식으로 요약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찾아낸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정리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분명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함을 채우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홉 분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모두 짚어보고 싶습니다만, 지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요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물론 보는 사람들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겠습니다만, 저 역시 여전히 자기중심적 사고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리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냈던 조지 캐틀렛 마셜장군의 삶을 보겠습니다. 남부의 오래된 가문 출신인 마셜장군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내야 했습니다. 공부도 뒤처지고 지나치게 사람들을 의식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실수가 이어지면서 말썽꾸러기 문제아라고 치부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사관학교로 진학할 무렵부터는 생각을 바꾸어 자신이 모자라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사관학교는 재학생들에게 영웅에 대한 존경심과 금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학교 생활을 통하여 마샬은 스스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기작가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마샬의 일생에서 도덕적 실패의 순간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군에서 보낸 마셜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설적인 조직력과 행정력을 발휘하여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이 준비한 프랑스 탈환작전의 지휘관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모두들 마셜장군이 맡아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인 역시 그 역할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정작 루스벨트대통령이 그의 뜻을 물었을 때 마셜장군은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루스벨트 역시 마셜장군이 적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마셜이 유럽에 있는 지휘소로 부임하여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불안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이젠하워에게 그 임무를 맡겼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후일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셜장군은 전쟁이 끝난 뒤에 맡은 유럽복구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마셜장군의 삶에서 저자가 얻어낸 지혜는 “고결한 지도자는 자신의 본성으로 국민들에게 커다란 혜택을 주는 일을 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그는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부과하고 공적 기능을 행하는 데 스스로를 헌신한다.(233쪽)”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흑인 인권운동을 선도한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틴의 삶 역시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비폭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권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대결과 다툼보다는 교육과 화해를 옹호하던 기존의 인권단체와는 달리 이들은 점거농성이나 시위 같은 적극적인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시위방식에 대한 랜돌프의 원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저항이 우리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 우리는 폭력을 흡수하고, 테러리즘을 흡수하고, 우리 행동에 따르는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251쪽)” 랜돌프의 이런 방침은 그의 보좌관이었던 러스킨의 행적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42년 내쉬빌을 방문한 러스킨은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구분된 버스에서 백인석에 앉겠다고 고집하였고, 버스기사가 부른 경찰이 달려와 그를 구타를 하는 동안에도 수동적으로 방어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운동이 폭력의 사용을 전제로 하고 있고, 폭력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본말이 전도된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사회운동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점입니다.

 

그런가 하면 랜돌프와 러스틴의 삶을 비교해보면 공적인 부분과 개인적 부분에서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이른 시대를 살았던 랜돌프는 불의에 맞서 싸우면서도 스스로 해이해지거나 죄를 짓게 될까 봐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청렴결백하고, 말을 삼가고 격식을 갖추는 모습 등 존엄성으로 그를 모욕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추종했던 마르크스주의와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노동현장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는 조직들을 추방하기 위하여 격렬하게 대립하기까지도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러스틴은 20대 후반에 이미 전설적인 시민운동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러스틴은 영웅적으로 행동했지만 간혹 오만과 분노가 묻어 있었고, 자신이 공언한 신념체계에서 벗어나는 무모한 행동을 할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표면화되지 못하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내기까지 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성적 파트너를 찾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성애적 취향보다는 성적 문란함이 문제가 되어 시민운동의 전면에서 퇴장해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역시 사회적 지도자가 되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도 소명의식에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 소명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설명하는 소명 혹은 특별함의 의미는 그야말로 특별한 것 같습니다. “내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살기 위해 태어났다. (…)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삶을 사는 의미가 없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데 내 나름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444쪽)” 즉 특별하다는 것은 남들과의 경쟁을 통하여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특별함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도덕적 환경이 조성됨에 따라 자기도취와 자기확대 성향이 강조되는 외적인 삶에 무게가 실려 왔다면 이제는 우리가 소홀하게 생각했던 내적인 삶과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모두 열다섯 가지 겸양의 규칙을 형성하는 일반적 명제를 정리해냈습니다. 적어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잊었던 진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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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달인이 되려면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 - 우리가 몰랐던 명문장의 진실
박찬영 지음 / 리베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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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으로 세 곳의 매체에 내고 있는 고정칼럼의 원고분량이 일 년이면 책 두 권의 분량에 이르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점점 글 쓰는 일이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퇴고를 하다보면 새로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감시간을 생각하면 섣부른 생각이라고 접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맞춤법은 ‘글’에 어느 정도는 기대어 해결하고는 있지만, 생각 없이 늘어놓은 글이 길어지는 것이나, 엉킨 생각을 그대로 쏟아놓은 글을 수습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안습니다.

 

일단 퇴고를 할 때는 쉽게 읽히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짧은 글로 만들려고 노력을 합니다. 글쓰기도 ‘투’라고 할 습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습관을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고 쓰는 버릇 같은 경우는 퇴고단계에서도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도서출판 리베르에서 나온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는 박찬영대표이사의 오랜 기자와 편집자 생활을 거치면서 터득한 글쓰기의 전형을 담았습니다.

 

저자는 문장의 달인이 되는 27가지의 비결을 주어, 서술어, 부사, 조사, 접속어 등 문장의 주요 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더하여 군더더기 제거, 대구 일치, 문장 분리, 논리 갖추기 등으로 화룡점정하는 법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제 읽는 사람의 몫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한 상을 잘 차려 놓았으니 이제 맛있게 먹는 일만 남은 셈입니다. 요점 정리에 더하여 응용까지 더했습니다. 유시민장관의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이외수작가의 <글쓰기의 공중부양>, 일본 작가 고가 후미다케의 <작가의 문장수업>, 유흥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공지영작가의 <공지영의 수도원기행2>, 조정래작가의 <태백산맥>, 이문열작가의 <우리들의 일그러징 영웅>, 고 박경리작가의 <토지> 등 쟁쟁한 작품들은 물론 조선일보의 <만물상>과 중앙일보의 사설과 칼럼 등이 저자의 날카로운 해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장의 달인이 되는 27가지의 비결을 풀어내기 전에 저자는 “가장 자연스러운 글은 입에 붙어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글이다.(12쪽)”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저도 퇴고를 할 때 읽는 흐름이 좋은 지를 우선적으로 봅니다. “글을 긴밀하게 연결할 자신이 없을 때 긴 문장이나 군더더기 표현을 쓰는 경향이 강하다.(19쪽)”라는 일갈에도 가슴이 서늘한 느낌이 듭니다. 저자가 정리해낸 27 가지 비결은 마음에 새기고 글을 쓰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전편이라고 할 2부에서 저자의 해부대상이 된 작품들은 이런 분들의 글에서도 문제를 찾아낼 수가 있을까 싶었던 작가들의 작품들입니다. 저자의 해설을 곁들여가며 다시 읽어보니 과연 새롭게 읽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정말 그럴까 싶은 대목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는 피동형이 발달해있다고 했지만, 일상에서는 능동형으로 글을 쓰라는 주문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지영작가의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2>의 서문에서 공지영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기대로 이 책을 선택하신 분이라면 ‘서문만 읽고 내려놓기를 권한다’라고 했다는 대목에서는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저자는 큰 틀에서는 원작의 핵심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모호한 점은 짚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태백산맥의 다음 대목의 경우입니다. “기러기 떼가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다지 높게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철교쯤의 갈 숲에서 날아오른 모양이었다. 어느 사냥꾼의 위험스런 그물을 피해 새벽잠을 팽개친 피난길인지도 모른다.(226쪽)” 사냥꾼이 잠자고 있는 기러기 떼에 그물을 던졌을까요? 오히려 총질이라도 해서 기러기 떼들이 놀라 날아오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궁금증은 몇 군데에서도 들었지만, 그냥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정리해보면 박찬영님의 <잘못된 문장부터 고쳐라!>는 글쓰는 사람이 새겨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될 좋은 내용이 잘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곁에 두고 늘 참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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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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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발칸여행에 챙겨갔던 다섯 권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를 챙겨 읽는 것은 여행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서문명의 충돌현장을 돌아보는 저의 여행은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터키를 거쳐 발칸에 이르렀습니다. 발칸을 여행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발칸반도 혹은 발칸국가의 범위였습니다. 발칸은 ‘산’을 의미하는 터키어입니다. 오스만제국 지배시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쳐있는 산맥을 발칸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 19세기 이후 반도전체를 부르는 이름으로 차용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발칸 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강을 경계로 한 이남의 지역을 말합니다. 따라서 발칸반도에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영토 모두가 포함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역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발칸반도에 들어갑니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발칸반도에 포함됩니다. 터키의 동부 트라키아 지방, 루마니아의 북도브루자 지방, 슬로베니아의 프로모르스카 지방,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고리치아 등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발칸국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위키백과, ‘발칸반도’를 참조함)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른 것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지금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황태자가 암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1991년부터 1999년까지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의 영토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분리독립 전쟁과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등이 이어져 화약고라는 용어를 실감나게 했습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스릅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브르치고 행정구로 갈라졌습니다), 세르비아(코소보가 독립을 선포한 상태),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이 독립했습니다.(위키백과,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참조함)

 

지역적으로는 일단 발칸을 정리하였습니다만,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20세기를 통하여 이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든 민족적 종교적 요소들이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국가들이 이합집산이 복잡한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칸사의 권위자이며 미국 컬럼비아대학 역사학과에 재직 중인 마크 마조워교수가 쓴 <발칸의 역사>는 복잡하기만한 발칸지역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먼저 발칸이라는 명칭과 발칸이라는 지역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자리잡아왔는지 줄거리를 정리하였습니다. 발칸지역의 혼란은 인종적 다양성과 오랜 세월에 걸친 종교 및 문화적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유럽의 영토와 정신을 7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도록 1,000년 이상이나 복잡하게 엮어 넣은 기독교와 이슬람세력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슬림국가들이 비이슬람교도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국가들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추방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종교적 대립이 꾸준하게 이어졌지만 근세에 이르러 오스만제국이 세력을 잃을 때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오스만제국을 두려워하고 또 존경했습니다. 무질서하고 나약하기까지 한 기독교 국가들과는 비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설교가 토머스 풀러는 “(술탄의 제국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굳건한 나라이며,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나라”라고 했답니다(25쪽).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빈공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등지를 점령하고 기독교인들을 이주시켜 발칸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반면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은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 사람들은 발칸을 깍아내리기에 급급하게 되었는데, 다분히 오스만제국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발칸반도의 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지만, 1829년 그리스가 독립한 뒤로는 발칸 국가들의 자치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1908년 오스만제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튀르크 민족주의에 발칸국가들의 우려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발칸의 실지를 찾으려 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1911년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 증대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가 오스만제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승세를 얻으면서 발칸국가들은 오스만제국에 대항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왕국, 그리스왕국, 세르비아왕국, 몬테네그로왕국 등이 러시아의 지원 아래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된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이 패전합니다. 제1차 발칸전쟁에서 패전한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발칸국가들은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즉 독자적인 힘을 토대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의 힘에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강대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바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보스포루스해협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진 러시아로서는 오스만제국에 대한 회유와 공세를 반복해왔고, 오스만제국의 몰락이 가져올 러시아의 부상도 달갑지 않은 유럽으로서도 곤혹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투르크족의 노예로 있을 때 그리스의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그런데 독립을 하고 나니 그 모습은 한마디로 끔찍스러웠다. 그리스인들의 삶은 절도와 폭행의 연속이었고, 방화와 암살은 그들의 취미가 되었다.(34쪽)”라고 적은 프랑스여행가도 있습니다. 발칸반도에 전해오는 민담 혹은 전설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끔찍했다는 내용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주민들을 못살게 하는 산적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오스만에 대항한 군사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당혹스럽기도 합니다(요르단 욥코프 지음, 발칸의 전설, 문학과 지성사, 2006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74940).

 

저자는 복잡하기만한 발칸의 역사를 1. 발칸의 영토와 주민들, 2. 국가 성립 이전의 발칸, 3. 동방문제, 4. 국가 건설 등의 순서로 정리하였습니다. 국가의 3요소 가운데 중요한 국민과 영토를 설명하고, 마지막 요소인 주권을 얻는 과정을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정리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부만 보았을 뿐입니다만, 발칸의 지형이 아주 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9세기 여행작가 아서 에번스는 “이 산맥의 기묘한 형상이 힘겹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나지막한 산맥, 풍화된 석회암 덩어리만 있을 뿐 풀 한 포기 없는 게…황량한 풍경(45쪽)”라고 헤르체고비나의 카르스트 지형을 묘사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드리아해안에 있는 코르츨라 섬에 가던 날은 폭우로 흠씬 젖고 말았습니다만, 일부 지역은 대체로 강수량도 많고 온화한 기후이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산이 험하고 비그늘효과로 인하여 비가 별로 내리지 않은 척박한 탓에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합니다. 발칸반도는 지형적 특성으로 남북방향의 이동은 어렵지만 동서 방향의 이동은 그리 어렵지 않아, 동쪽으로부터는 슬라브족들이 이주해왔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해의 해안과 바다를 통하여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사람들이 이주해왔습니다. 앞서 발칸의 민담에서 터키관헌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아 보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스만제국은 농민들은 호의적으로 대하고 지방관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세기 오스만제국의 관리를 지낸 사리 메메드 파샤의 글입니다. “지방관리들로 하여금 가난한 레아(농민)를 억압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농민들이 매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금 외 별도의 세금을 요구하여 그들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한다.(63쪽)”

 

비잔틴제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지배구조가 넘어갔을 때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종교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정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오스만제국은 어느 민족이나 술탄의 신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스만제국은 이교도에 대하여 군인으로 동원하는 대신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이교도의 충성심을 믿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금원이 되는 이교도를 박해하여 이탈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스만 말기에는 개종을 불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발칸반도에 눈독을 들이면서 이 지역에서는 종교와 민족을 매개로 한 세력의 집결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유럽 열강들은 여기에 편승하여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얻은 신생국가들은 영토확장에 열을 올렸습니다.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의 패배로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에서 물러난 이후, 이번에는 발칸동맹에 참여한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제2차 발칸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분할했는데 불가리아가 대부분을 차지한 것에 세르비아가 반발한 것입니다. 마케도니아를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은 불가리아가 1913년 6월 29일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선전포고를 해서 제2차 발칸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루마니아, 오스만제국, 몬테네그로 등이 세르비아와 그리스 동맹에 가담했고 결국 불가리아가 패전하게 됩니다.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일련의 갈등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됩니다.

 

앞서 소개한 사라예보사건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청년이 저질렀지만 불똥은 세르비아로 튀었습니다. 세르비아가 러시아제국을 등에 업고 벌이는 남슬라브운동을 위태롭다고 본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한 것입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때 오스만제국 역시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동맹국에 참가하였다가 패전의 멍에를 쓰게 됩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연합군과 독일 사이에 종전을 위한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탈리아가 아드리아해안의 달마치아에 대한 영토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편된 발칸의 국경은 복잡한 민족구성을 반영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습니다. 영토가 확장된 루마니아의 경우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이 전체 인구의 28%에 달했고,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경우는 15%, 불가리아도 20%가 이민족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별도로 전쟁을 치룬 그리스와 터키는 대규모로 주민을 교환한 바 있지만, 발칸국가에서는 이보다는 소수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민족들은 체계적으로 억압을 받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치 독일이 발칸지역을 점령하면서 발칸지역의 인종들 사이의 갈등이 한층 고조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인종 간 충돌로 대량학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발칸지역이 공산화되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인종갈등이 공산세력이 무너지면서 다시 현실화되면서 특히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던 유고연방에서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폭력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에필로그에서 발칸에서 벌어진 야만성과 폭력은 서구의 책임이 적지 않으며, 서구의 잣대로 판단한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발칸의 역사를 돌아보면 발칸이 번영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빠트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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