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세트 - 전3권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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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여행의 일정에는 오스트리아의 멜크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멜크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인솔자는 올 초에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가 처녀작 <장미의 이름>에 대한 기획을 이곳에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푸코의 진자>를 꼭 읽어보길 권하였던 것입니다.


에코의 서지목록에서 <푸코의 진자>를 처음 발견하였을 때는 먼저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와 관련이 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배경이 선뜻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푸코의 진자’는 1851년 프랑스 물리학자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Jean Bernard LAon Foucault)가 지구의 자전현상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푸코는 67m의 강철줄로 매달린 28㎏의 철구를 판테온의 돔에 걸고 기구를 이용하여 계속 진동시켰더니, 진자의 진동면이 시계방향으로 회전하여 36시간에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북극에서는 진자의 진동면이 24시간에 일주를 하지만, 적도에서는 회전하지 않습니다.


<푸코의 진자>는 서구사회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전설의 기사단 혹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결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내용만 1123쪽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인데다가 등장인물도 적지 않고, 무대 역시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대륙까지 망라하고 있어 이야기의 전체 구조를 가늠하는 일조차도 버거운데, 작가의 방대한 인문, 철학적 앎이 작품 곳곳에 펼쳐져 있어 쉽게 몰입하기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동사양의 고전은 물론 각종 기호학적, 수학적 표식들, 히브리어와 라틴어는 물론 각종 유럽어 들까지 늘어놓는 바람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헷갈리는 바람에 뒤돌아가야 했는데, “에코 … 푸코 … 사이코”라고 했다는 출판팀의 하소연이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 3인방, 카소봉, 벨보, 디오탈레비 등이 밀라노의 출판사 사장 가라몬드씨와 출판기획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푸코의 진자>에서 시작된 작가의 글쓰기 비결을 엿볼 수 있었던 점이 흥미롭습니다. 3인방 가운데 카소봉의 모습이 에코와 중첩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3인방 모두가 에코의 분신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에코의 분신인 카소봉은 좋은 문헌목록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푸코의 진자 2권 406쪽) 이 방법은 관련 문헌을 수집하여 진위를 가리고 그 내용을 잘 정리하여 색인목록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실제 책을 기획하는 작업의 사례로 성전기사단에 관한 책을 만드는 작업을 소개하였습니다.


“만일에 말이죠. <악마 연구가들>의 작품에서 추출한 몇 가지 아이디어, 가령, 선전 기사단은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거나, 『연금술 대전』은 1460년 피렌체 도착했다는 등등의 아이디어에, <분명한 사실은……>, <……임을 입증한다>, 이런 연결 어구를 입력시키면요? 뭔가 눈에 번쩍 띄는 게 나오는 게 아닐까요? 뭐가 나오면, 공백은 적당하게 메우고, 반복된 부분은 예언이라 명명한다면 적어도, 일찍이 출판된 적이 없는 미증유의 마술사 한 장(章)은 되지 않겠느냐고요.(푸코의 진자 2권 406쪽)” 아마도 <푸코의 진자>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나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카소봉의 아이를 가지게 되는 리아는 자료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능력이 카소봉 보다도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기사단에 관한 책을 쓰는 계기가 된 쪽지를 잘못 해석한데서 오는 오류를 바로 잡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만 어느 순간 이야기의 중심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아 역학에 대한 궁금증을 일게 합니다. 리아의 의해서 전체 이야기의 핵심이 흔들리면서 자칫 ‘똥그랑 땡’(모든 이야기가 일장춘몽이었음을 나타내는 저만의 표현입니다.)으로 끝날 이야기가 벨보의 엉뚱한 짓 때문에 파리 공예박물관에서 성전기사단이 소집되는 것으로 상황을 다시 반전시킨 것이야말로 작가적 역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전 기사단이 현존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허구의 집단이라는 것인지 여전히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푸코의 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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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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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행지에 관련된 책 말고도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책도 함께 가져갑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도 되고, 여행을 통하여 얻은 느낌과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을 발견하는 경우 여행기를 적을 때 도움이 되어 일석이조인 셈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지난 9월 동유럽여행길에 가져간 책인데,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할 짬을 만드느라 글쓰기가 늦어졌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년전에 그의 데뷔작 <순례자; http://blog.joins.com/yang412/13056408>를 북소리에 소개하면서 만난 바 있습니다. 스페인을 다녀와서 <연금술사: http://blog.joins.com/yang412/13536943>를 만나기도 했지만,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습니다. 194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그는 록 음악 작곡가로서 브라질 음악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스트, 록스타, 극작가,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 등 다양한 이력을 거쳤는데, 1986년 돌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순례 이후 첫 작품 <순례자>를 썼고, 이듬해 <연금술사>를 발표하여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가 삶을 통하여 직접 겪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여행을 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적은 것으로, 이 가운데 전 세계 신문과 잡지에 게재된 것도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글 ‘방앗간 집에서의 하루’을 피레네에서 쓴 것처럼 글 역시 다양한 곳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40세가 되어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이 책의 프롤로그를 보면 그는 이미 열다섯에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작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조사에 착수하였고, 작가라는 존재에 대하여 여덟 가지의 정의를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작가는 자기 세대로부터 절대 이해받아서는 안 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라는 제법 심각한 것도 있지만, “작가는 여자를 유혹하고 싶을 때마다 냅킨에 시 한 편을 써서 건네며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작가입니다.’ 언제나 통하는 방법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웃긴다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 101꼭지의 글을 모았습니다. 제목처럼 생각이 그저 흐르는 대로 맡기라는 의미였는지 특별하게 정해진 바가 없이 글들을 늘어놓았습니다. 글을 쓴 순서라거나, 주제에 따라 나누었다거나, 하다못해 자모순으로 나눈다는 규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서가 없으니 처음부터 읽어도 좋지만, 아무데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주제로 나뉘었다고 해도 모든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101 개나 되는 글에 대한 느낌을 모두 적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눈에 띄어 무언가 한 마디를 남기고 싶은 경우만 짚어볼까 합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느낌이 있는 대목에는 표시를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백에 느낌을 적기도 했습니다만, 다시 읽을 때 여백에 적힌 느낌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이 버릇을 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귀퉁이를 접었다가 나중에 따로 독후감을 쓰기도 했는데, 왠지 책이 아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를 잘라 만든 띠지를 끼워 넣기도 했는데, 십여 년 전부터는 다시 떼어 쓸 수 있는 견출지를 붙이곤 합니다. 물론 독후감을 쓴 다음에는 다시 떼어내 재활용을 합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첫 번째 견출지를 붙인 글은 세 꼭지나 할애한 마누엘에 관한 글입니다. 첫 번째 글은 마누엘이 바쁘게 사는 이유에 관한 내용입니다. 마누엘은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입니다. 삶의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사회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자, 책임감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마누엘에게 천사는 이렇게 일렀다고 합니다. “하루에 십오 분만이라도 일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과 자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없나? (…) 노동은 축복이라네. 그곳을 통해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러나 일에만 매달려 삶의 의미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저주야.(73-76쪽)” 저자는 일에 대한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일깨웁니다.


그런 마누엘이 퇴직을 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일 이외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누엘은 서글퍼집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사회와 가족을 위해 헌신했는데도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누엘에게 천사는 “자네는 인생에서 무엇을 일구었나? 꿈꾸던 인생을 살았나?(79쪽)”라고 묻습니다. 마누엘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럴까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닐까요?


우울증에 빠져 살던 마누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코엘료는 헨리 드루먼드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에 적은 “우리 삶의 정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리고 마누엘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의 마누엘은 죽는 순간 구원을 얻었다. 비록 삶의 의미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는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족을 부양했고,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했으니.(82쪽)” 그렇습니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면 거창해 보이는 삶의 의미까지는 몰라도 좋은 삶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행길에 읽었으니 아무래도 여행에 관한 이야기에 눈길이 갔던 것 같습니다. ‘다르게 여행하기’라는 글은 제목까지도 독특한 것 같습니다. 코엘료는 철들기 전부터 최고의 배움은 여행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이순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늦되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떻든 코엘료가 조언하는 다르게 여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박물관을 피한다, 2. 술집에 간다, 3. 마음을 열자, 4. 여행은 혼자서 가되,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와 간다, 5. 비교하지 말자, 6. 모두가 우리를 이해한다는 것을 이해하자, 7. 너무 많이 사지 말자, 8. 한 달 안에 전 세계를 다 보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9. 여행은 모험이다, 등입니다. 적고 보니 꽤 많습니다. 그리고 공감이 되는 점도 있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어떻든 코엘료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것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여행을 보면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정직’을 화두로 한 글은 고대 중국의 왕실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왕자비 간택령이 내려지자 궁에서 오래 일을 해온 여인의 딸도 나섰다는 것입니다. 간택이 될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오랫동안 사모해온 왕자님을 지근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왕자님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택에 나선 처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왕자님의 준 씨앗으로 여섯 달 안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처녀가 왕자비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처녀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정성을 들였지만 화분에서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처녀는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이지만 왕자님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궁궐로 갔습니다. 다른 처녀들은 저마다 멋진 꽃이 자란 화분을 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지목한 사람은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 화분을 가져온 처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자님이 나누어준 씨는 싹을 틔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녀야 말로 ‘황후의 미덕, 바로 ’정직‘이라는 꽃을 피워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미래의 황후가 될 왕자비감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정직‘이라는 생활태도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앎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도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터널이나 다리의 준공식 장면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글도 흥미롭습니다. 모든 준공식에는 발주처와 시공처 대표, 정치인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하객들과 함께 서서 준공테이프를 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코엘료는 겉으로 보이는 준공식의 장면에서 공사 중에 땀흘려 일한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언제나 생색은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내지만, 그래도 자신만이라도 보이지 않는 얼굴, 명성도 영예도 쫓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그 얼굴들을 지켜보는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일본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였던 아이다 미쓰오의 걸작 시로부터 얻은 영감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대목일 듯합니다. “(…) 꽃은 그저 한 송이 꽃일 뿐이나 / 혼신을 다해 제 소명을 다한다. / 외딴 골짜기에 핀 백합은 /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


저 역시 얼추 30개국에 걸쳐 헤아릴 수 없는 도시를 가보았기 때문인지 ‘죽은 후의 세계일주’라는 글을 읽으면서 공감과 의문이 같이 들었습니다. 코엘료 역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만큼 “우리의 몸을 세계 도처에 뿌려두면 어떨까. 만약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낯익은 무언가를 찾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독특한 장례절차를 치른 미국여성의 이야기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오리건주 메드퍼드에서 보낸 미국 여성은 정년퇴직을 하면 세계를 돌아보는 꿈을 키우며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뇌졸중에 폐기종까지 겹쳐 꿈을 이룰 수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로 가는 마지막 여행을 앞두고 자신의 장례절차에 관하여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화장한 뒤 유골을 241개의 작은 주머니에 넣어 미국 50개주와 전 세계 19개국의 우체국장 앞으로 보냈습니다. 고인의 뜻을 밝히고 유골을 고이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동봉하였습니다. 그녀의 유골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청을 정중하게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생명부지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형식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아메리카 어느 고아원의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고인을 위해 기도를 드린 뒤 정원에 유골을 뿌렸고, 고인을 고아원 아이들의 위한 수호천사로 모셨다고 합니다. 고인의 아들은 다섯 개 대륙, 모든 인종과 모든 문화권으로부터 그녀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해준 사람들의 사진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인은 평생의 소원대로 자신의 몸의 일부일망정 항상 꿈꿔온 곳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코엘료는 이 이야기에서 고인이 독특한 꿈을 가진 것도 대단하지만, 아직도 우리 인간들의 영혼에 존경과 사랑과 관용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생각에서 희망을 부풀리게 만든다고 적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코엘료의 열린 마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이르게 된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를 지적하는 ‘근거 없는 믿음’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1. 마음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다, 2. 육식은 깨달음을 멀리하게 한다, 3. 신의 본질은 희생이다, 4. 신에게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가톨릭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코엘료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행동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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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
브라이언 스티븐슨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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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교도관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끔찍한 범죄의 현장을 보면 사형제도를 존속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형집행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현장에서 체포된 경우가 아니라면 사형수의 범죄사실이 얼마나 완벽하게 입증된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결정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이 쓴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록 미국의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만, 사형제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기회였습니다.


스티븐슨은 뉴욕 대학 로스쿨 교수이자, 비영리 법률 사무소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의 상임 이사입니다. 1959년 델라웨어 주 밀턴에서 태어난 스티븐슨은 1983년 하버드 로스쿨 재학시절 미국 애틀랜타에 있는 남부 재소자 변호 위원회(SPDC)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형수를 만난 뒤 형사 사법 제도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애틀란타로 가는 비행기에서 SPDC의 책임자 스티브 브라이트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후 SPDC에서 변호사업무를 시작하였고, 4년 뒤인 1989년 앨라배마 주에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를 열었습니다. 빈곤층, 흑인, 청소년,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무료 변호를 한 것입니다. “브라이언, 사형이란 <돈 없는 사람이 받는 처벌>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사형수를 도울 수 없어요”라는 브라이트의 말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그의 첫 번째 저서입니다. 백인 여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수가 된 흑인 월터 맥밀리언의 사건을 중심으로 몇 가지 사례를 덧붙였습니다. 엄마를 폭행하는 동거남을 쏘아 죽인 14살 소년이 사형을 선고받기에 이른 사건이나,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던 상이군인이 짝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는 일념으로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바람에 그녀의 조카가 죽는 사고로 역시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 등이 더해졌습니다. 월터 사건은 남부지역 특유의 인종차별적 인식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실감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사법제도의 맹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물론 스티븐슨이 의뢰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어 사형을 면하게 하거나 종신형을 감형받을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였거나 제도의 틀을 넘지 못하여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사례들도 인용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듭니다.


월터 맥밀리언을 변호하면서 스티빈슨은 ‘가난하고 결백한 사람보다 부유하고 유죄인 사람을 대우하기만 하는 형사사법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 즉 “자비란 희망에 기초해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해질 때 의롭다는 사실”을 월터로부터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Just Mercy"라고 정했을 것입니다. 자비는 누군가에게 힘을 불어넣고,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주며, 누군가를 변화시킨다고 저자는 믿습니다.


월터 맥밀리언 사건을 소개하는 첫 장의 제목은 ‘앵무새 죽이기’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앵무새 죽이기>로 유명한 여성 작가 하퍼 리의 고향 앨라배마 먼로빌은 이 사건의 주인공 월터 맥라이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먼로빌은 1960년대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던 <앵무새 죽이기>를 지역홍보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백인여성을 강간했다는 무고한 죄목으로 기소된 흑인남성을 용감하게 변호하는 백인변호사 애티커스 핀치와 그의 딸 스카웃이 남부 특유의 인종적, 사법적 현실에 맞서는 모습에 많은 미국인들이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런 먼로빌에서 역시 무고한 월터 맥밀리언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1980년대의 후반입니다. <앵무새 죽이기>를 앞세우고 있지만, 먼로빌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던가 봅니다.


1986년 11월 1일 늦은 아침, 열여덟의 백인 여대생 론다 모리슨이 먼로빌의 한 세탁소 바닥에서 세발의 총알을 맞고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월터는 자기 집 앞마당에서 종일 ‘피시 프라이’라는 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물론 많은 동네 사람들도 월터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터가 모리슨 살인사건의 혐의를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수사관이 무모할 정도의 사건 끼워 맞추기를 시도한 까닭입니다. 물론 월터가 빌미를 제공한 것은 있습니다. 우연히 만난 백인 여성 캐런 켈리의 유혹에 빠졌던 것입니다. 월터와 켈리의 밀애는 가족들에게 알려졌고, 월터는 켈리 부부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증인으로 소환되어 ‘친구’사이였음을 시인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구체적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먼로빌의 백인주민들로부터 월터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앨라배마주는 21세기까지도 <이인종 간 결혼 금지법>이 존속될 정도로 보수적인 곳입니다.


문제는 켈리가 마약에 손을 댔고, 새로 사귄 랠프 마이어스라는 백인 남자는 마약 중독을 넘어 심각한 범죄자였던 것입니다. 켈리와 마이어스는 살인사건에 휘말렸고, 수사과정에서 마이어스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수사관들이 모리슨사건 때문에 몰리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마이어스는 월터와 켈리가 모리슨 사건에 가담했다고 주장했고, 수사관들의 주도로 사건을 짜 맞추기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월터의 국선변호인은 월터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재판부에 제시하는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판부 역시 사건을 조기에 종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법제도의 독특한 구조의 하나인 배심원이 무작위 추첨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미국의 남부지역의 강력사건에서 소수민족이 관련된 강력사건의 배심원들은 대부분 백인들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지역주민 비례로 구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월터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월터는 사형수가 되어 형집행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인데, 마침 이 책의 저자인 스티븐슨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앨라배마주가 얼마나 보수적인가 하는 것은 스티븐슨이 월터의 변호사로 선임되자마자, 담당판사로부터 이 사건에 개입하지 말라는 설교조의 훈계를 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사무실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를 받기도 합니다. 반면 흑인사회에서는 ‘자네는 정의를 위하여 북을 치고 있네’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검사측이 확보한 증인의 증언을 토대로 사형이 선고된 월터 사건의 항소과정에서 검사측이 내세웠던 증인이 증언을 번복하였음에도 항소법원은 항소를 기각하였습니다. 검사의 직권남용, 인종차별적인 배심원단 선정, 부적절한 재판지 변경, 심지어는 배심원단이 종신형 평결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이를 번복하여 사형을 판결한 점까지도 모두 적법하였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월터의 무죄를 입증할 자료를 꾸준하게 모아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최초의 위증으로 월터를 함정에 빠트린 마이어스의 번복증언과 켈리의 증언도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판결을 앞두고 CBS의 인기 프로그램 「60분」에서 월터의 사건을 심층취재하여 보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지 월터는 무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판결을 앞두고 최후변론에서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억울하게 기소된 이 남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짓을 이유로 사형수 수감 건물에 보내기는 너무 쉬웠습니다. 반면 그의 결백을 입증하고 다시 자유를 찾아 주기까지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앨라배마 주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존재하며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 있습니다.(339쪽)” 그렇습니다. 충분하지 않는 증거를 토대로 유죄라고 판단하기는 쉽지만, 한번 내린 판결을 뒤집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판단도 신중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충분한 사유가 있다면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월터의 사회복귀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지역사회의 반감을 극복하는 문제와 생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월터는 감옥에서 나온 초반에는 활기를 보였지만, 점차 위축되어 갔고, 종국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앞두고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강인한 인내심과 잘못된 결정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함을 보여준 월터의 의연한 모습은 같은 처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을 뿐더러 이런 이들을 도와주는 스티븐슨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 가운데 충격적인 장면은 사형수를 전기의자에 앉혀 처형하는 장면의 묘사입니다. 1,900볼트의 전기 충격을 30초간 가하는 동안 전극을 부착한 부위에서 화염이 일고 불꽃이 튀었으며 살과 옷이 타면서 내는 강렬한 악취가 증인실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의사가 수인을 검사했을 때 아직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전기충격을 반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고, 변호인은 주지사와 통화를 하고 있던 교도소장에게 형집행을 더 이상 진행하지 말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되었습니다. 잠시 뒤 다시 30초간의 전기충격이 가해졌고 그때서야 수인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사실 도축장에서도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경우는 더욱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단번에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충분한 강도의 충격을 가할 것이며, 한 번의 시도에 죽음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다시 시도를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드렸던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 http://blog.joins.com/yang412/12510155>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사형을 집행하는 과정에 의사가 입회하여 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는 일은 분명 생각해볼 일입니다. 필자의 경우, 전공 때문에 주검을 대할 기회도 많았고, 노환이나 질병으로 죽음을 맞는 과정을 지켜볼 기회도 적지 않았습니다만, 자살이나 사형의 집행과 같이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시키는 끔찍한 순간을 지켜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자리라면 사양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저지르는 강력범죄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신질환을 빌미로 처벌을 빠져나가려는 질 나쁜 범죄자와 진짜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우발적 범행을 저지른 환자를 제대로 구별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의학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적 양심에 따라 판단을 하여 사법적 판단이 올바르게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 역시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에서 논의된 바가 있습니다.


사형수 월터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면서 저자는 미국 사회가 범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는 경향이 여전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범죄자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혹은 분노가 낳은 결과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형제도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죽일 자격이 있는가?(471쪽)’라고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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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여행자, 트루바두르 지중해지역원 번역 시리즈 8
조세프 앙글라드 지음, 장니나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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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여행’이라는 요즘 뜨는 용어와는 달리 트루바두르라는 이름은 생소하기만합니다. 그 생소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트루바두르(Troubadour)는 11-12세기에 흥성한 남프랑스의 오크어 음유시인이다. 좀더 늦게 흥성하는 북프랑스의 트루베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트루바두르들은 갖은 형식의 세속가곡으로 궁정연애를 노래했는데, 개중에는 planh (탄식), sirventès (풍자시), pastourelle (전원시), tenson (논쟁시), canso (칸소), 등이 있다.”고 합니다.


푸아티에 백작 기욤 다키텐으로부터 시작되어 14세기 최후의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기욤 드 마쇼로 끝을 맺는 트루바두르 시는 전개하던 시기(1090-1140년), 황금의 전성기(1140-1250년), 그리고 쇠퇴기(1250-1292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일대기가 남아 있는 트루바두르는 111명으로 전체 트루바두르의 4분의 1 수준이라고 합니다.


<지중해 여행자, 투르바두르>는 낭시대학이 1907-8년 겨울학기에 개설한 강의의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트루바두르들, 그들의 삶, 그들의 작품, 그들이 끼친 영향>이 원제입니다. 교재인 만큼 대중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중세 남프랑스의 독특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남프랑스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 라틴어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트루바두르 시를 노래한 언어적 특성으로부터 사회적, 예술적 특징 등에 대하여 기술하며, 몇 가지 대표적 시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트루바두르의 신분은 귀족으로부터, 성직자, 하층계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는데, 여류시인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노스트라다무스는 제앙 드 노트르담(jehan de Motredame)이라는 트루바두르라고 합니다. 그는 상상력과 환상을 암시하며 정확한 사건들을 혼합하면서 트루바두르들의 전설적인 삶을 창조하였는데, 사람들이 신화에 불과한 속임수를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아름다운 기만과 문학적 농담 그리고 허풍이었다는 것입니다.


트루바두르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적이었는데,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가 봅니다. 가사만을 우리말로 옮기다보니 산문형식이 되어 원래의 느낌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프랑스 샹송과는 다른 장르인 샹송이라는 형식의 트루바두르 시의 예를 들어보면, “초록 수목과 잎이 보이고 꽃들은 과수원에서 활짝 피었네. 밤꾀꼬리는 높고 맑은 소리를 만들어 멋진 노래를 지저귀네. 새 소리를 듣는 나는 행복하고 꽃을 바라보아 기쁘네. 만족스러운 나, 나의 귀부인도 그러하네.(107쪽)”


노랫말에서 보는 것처럼 귀부인에게 바친 노래였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트루바두르와 귀부인과 사이에 연분이 생기기도 하였는데, 특히 신분상에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심지어는 주군의 부인과 염문을 뿌려 죽음을 맞거나 쫓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트루바두르는 결혼한 기혼여성에게만 찬미와 경외감을 바쳤다고 합니다. 찬미와 경외감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데, 사랑이 성숙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참을성이 필수적인 덕목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결혼한 기혼여성이 상대였기 때문에 연애에 있어 신중함은 반드시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사랑에 눈이 멀게 되면 신중함은 저 멀리 달아나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에두르는 듯해서 성에 차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직설적인 것이 때로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경우도 있으니 한번쯤은 에두르는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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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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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광화문이 뜨거웠던가 봅니다. 100만명의 인파가 몰려 촛불을 들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긴 대통령님의 퇴진요구는 어제 오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 대통령님도, 바로 앞 전 대통령님도 취임하자마자 퇴진을 요구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분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 대통령더러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입니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나라가 망할 때가 된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슬며시 생깁니다. 물론 왕조가 아니니 망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웠던 조선왕조가 망한 원인을 분석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에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1392년 창건되어 1897년까지 이어졌고, 고종 이희에 의하여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어 1910년까지 일본제국과 합방되기까지 519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1100년 동안 이어진 베네치아가 있지만, 공화국이었고, 왕국 혹은 제국으로는 1088년을 이어갔던 비잔틴제국이 최장수왕국이었고, 그 뒤를 992년의 신라가 있습니다만, 하나의 왕국이 500년 넘게 존속했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중국의 역사상 첫 번째 통일왕국이었던 진나라는 기원전 8세기 중반 비자(非子)에 의하여 주나라의 부속국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기원전 221년에는 시황제에 의하여 천하통일을 이루었지만, 불과 15년이 지난 206년에 한나라 유방에 의하여 멸망했습니다. 한편 고구려와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른 수나라 역시 581년에 성립되어 589년에 중국대륙을 재통일하였지만, 619년에 멸망하였으니 39년 동안만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이은 주나라가 가장 오랜 왕국이었는데, 춘추전국시대에 해당하는 동주(東周) 시대를 제외하면 서주(西周) 시대는 275년에 불과합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로 300년 정도 존속했던 것입니다. 땅덩어리가 넓으니 야심가도 많아서 왕국을 이어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반면 조선은 땅이 넓지 않으니 감시를 피해 세력을 키우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터라서 왕실 안팎의 사정이 어지간하지 않으면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진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결탁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신라와 고려가 망한 것은 지방호족이나 중앙의 특정세력이 힘을 결집할 수 있도록 통제하지 못한 탓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멸망은 일단 일본제국이라는 외세에 의한 침략이 핵심요인이라고 하겠는데, 외세를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자체 역량을 결집하지 못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조선의 멸망을 가져온 내부적 요인으로 불합리한 제도를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정병석교수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역학을 전공하고 행정고시에 수석합격하여 노동관련 정부부처에서 근무하다 노동부차관을 역임하였습니다. 퇴임 후에는 경제사와 성장론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는 아니나 정부관료로 오래 일하면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멸망원인을 제도사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왜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잘사는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남한과 북한의 현 상황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즉, 오랜 역사에 걸쳐 하나의 민족으로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가진 나라였던 남한과 북한이 오늘날 경제력에서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 이유는 제도의 차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와 MIT의 경제학, 정치학교수인 대런 애쓰모글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교수 등이 쓴 「장기 경제성장의 근본 원인으로서의 제도」라는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은 지리, 기후, 자원, 문화, 종교, 언어, 인종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하지만 오직 정치와 경제제도만 차이를 가졌던 것인데 경제적 성과에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부사항을 챙겨보면 남북한 간에 정치와 경제제도 이외에도 상이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며, 그런 요소들이 경제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제도에 중점을 두는 경제성장론(즉, 제도론)의 관점에서 검토해보면, 남북한의 격차를 제도의 차이로 분석하는 것처럼 조선이 왜 쇠퇴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7쪽)”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저자의 관점은 분명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처럼 서로 비교할 상대가 있는 경우하고는 달리, 조선처럼 비교할 상대가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해석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중국 혹은 일본의 제도와 비교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은 저자가 조선사를 깊이 연구한 바 없으니 민족사관이니 식민사관이니 하는 특정한 사관에 치우침이 없다고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된 제도 운용으로 결국은 멸망에 이르렀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조선의 제도사를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중요제도에 담긴 경제학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제도의 변천과정을 기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기술방식에서는 때로 자신의 주장에 합치되는 부분만을 선택하여 해석함으로써 같은 제도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잘 들어맞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루이14세의 프랑스왕국과는 달리 조선의 정체는 왕정이었지만, 정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또한 사헌부, 사간원과 같은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견제장치를 갖추어진 정부형태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서 시행한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는 구조적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차적 요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왕조를 움직인 기본철학은 성리학(性理學)이었습니다. ‘성명·의리의 학문(性命義理之學)’을 줄인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의리(義理)·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여 집대성한 것입니다. 성리학에서는 도교와 불교가 실질이 없는 공허한 교설(虛無寂滅之敎)을 주장한다고 이단으로 배척하였는데, 불교가 고려사회에 끼친 폐해가 크다고 본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권근의 이기심성(理氣心性)론을 보면, 군주 및 지배층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인정(仁政)·왕도(王道)의 실천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밝히고 있는 것처럼 조선왕조 초기 성리학은 왕조의 통치철학으로 합당한 것이었지만, 왕조의 중심을 차지한 사림집단의 비중이 커지면서 점차 양반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대중을 포용하는 정신이 희박해지고, 실무보다는 허례에 매달리는 경향으로 흐르면서 사회구조가 유약해진 것으로 저자는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의 지식계층은 고려시대에 세계최초로 개발한 금속활자를 개발한 선진인쇄술을 활용하여 지식의 확산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독점하는데 그쳤으며, 양반제도 및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4민체제 그리고 노비제도 등 착취적 신분제도를 운용한 것이 조선사회를 취약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양반들은 중앙 뿐 아니라 향촌에서도 아전 등 향리들과 결탁하여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여 일반백성들을 착취하는 존재였을 뿐 아니라 농공상등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사회에 직접 기여하는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공업과 상업 활동을 억제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시행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외면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 의복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 뽕나무나 면화 등 특용작물의 재배와 분업 등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일을 권장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농지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을 터라서 식량이 아닌 특용작물을 재배하기 위하여 농지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도 지적하였습니다만, 조선왕조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였으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중국과 사대외교의 관계를 유지하여 군사적 충돌을 피함으로서 백성들의 군비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군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중국에 시빗거리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조선을 유일하게 문명한 나라로 상대할만한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이 결과적으로 문약한 나라가 되고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명나라와의 선린관계를 지키려다 신흥 청나라가 명나라와 대결하는 마당에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려다가 호란을 당한 사정은 당시 왕실과 조정대신들의 정책적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이는 점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왕조 안팎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현대적 방식으로 옛일을 평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옳은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세에 서구사람들이 조선의 존재를 몰랐다고 하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고려 왕조까지만 해도 예성강 벽란도가 국제무역항으로 널리 알려져 대한민국을 코리아라고 부르게 된 까닭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동방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에 도착한 것이 1498년, 중국 광동에 도착한 것이 1513년입니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라비아의 상인들로부터 얻은 항로정보가 도움이 되었을 터입니다. 또한 아라비아상인들이 벽란도에 드나들었을 터이니 불과 200여년 만에 고려에 대한 정보가 깜깜절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대외교류중단 정책과 맞물려 조선 역시 외국과의 교류를 끊고 살았던 것은 정책적 오류였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저자는 조선이 성장할 수 없었던 이유를 경제성장론으로 설명합니다. 경제성장론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려면 자본과 노동,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며 국가의 총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 등의 요인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재정으로 움직이는 작은 정부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공사를 벌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건설은 물자와 노동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공사를 벌이려면 조세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백성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니 비용-효과적 측면을 면밀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는 상인과 기술자를 천시하는 등 상공업이 발전할 여건을 마련하기보다 오히려 상업 활동을 억제했다는 것이 정책적 실책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한 상업 활동에 관심을 가진 백성들이라고 하더라도 이윤을 얻게 되면 양반들의 착취대상이 되는 것을 기피하였던 것도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저 자급자족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생산의욕을 북돋울만한 시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낮다고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해서 먹고살만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상이 각박해지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과 행복한 것은 반드시 동행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에 살았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행복지수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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