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길이 만나는 곳 세계신화총서 10
샐리 비커스 지음, 강선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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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신화는 다양한 형식의 유럽예술에 있어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시대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해석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 탓인지 이해되지 않는 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로 이어지는 연작에서도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런 의문이 새로운 해석을 낳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 [북소리]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설화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샐리 비커스의 소설 <세 길이 만나는 곳>을 소개합니다. 오이디푸스신화에 대한 속 시원한 답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이 생긴 책읽기였습니다. 언젠가 치매학회에서 재미있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커다란 검은 상자를 비추면서 과거에는 치매 전체가 비밀에 싸여있었는데, 많은 연구를 통하여 그 상자를 열었더니 여러 개의 작은 검은 상자가 들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치매에 관한 더 많은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학동네의 세계신화총서의 하나로 소개된 <세 길이 만나는 곳>은 52살에 첫 작품을 발표한 영국의 늦깍이 작가 샐리 비커스의 소설입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작가의 역량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책소개를 통하여 오이디푸스신화를 재해석한 이야기라고 알았던 것인데, 막상 첫머리에서 프로이트의 말년이 등장하여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 플로이드일까? 아마도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창시한 인연 때문인 듯합니다.


프로이트는 예순일곱이 되던 1923년 구강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받았고, 이후 16년에 걸쳐 33번의 치료를 받았는데, 마지막에는 라듐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암의 원인이 되었을 시가 피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강암 치료는 수술로 암을 잘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환자가 시가를 계속 피운 탓인지 암이 계속 재발한 것을 보면, 림프절에 전이에 관한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3기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구강암환자의 5년 생존율은 수술과 방사선치료법이 발전하였음에도 수십 년 동안 별로 개선되지 않아 50% 정도에 머물고 있는데, 3기가 41.3% 그리고 4기의 경우 26.5%에 불과한 것을 보면 프로이트는 장수한 셈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도 소포클레스를 포함하여 다양한 재해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오이디푸스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였지만,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고 테베로 입성하는 것까지만 전하는 신화도 있다고 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아버지 라이오스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겼습니다. 젊은 시절 라이오스는 피사의 펠롭스왕에게 의탁한 바 있는데,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에게 반하여 그를 테베로 데려왔습니다. 크리시포스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하자 라이오스는 그를 목졸라 죽였고, 펠롭스는 라이로스를 저주하기를 ‘너는 네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한 것이 신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들이 지나치게 인간사에 개입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인간의 염원이 신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 신탁을 구하는 과정을 보면 알고자 하는 것을 적어 예물과 함께 신전에 바치면 피티아라고 하는 여사제가 신에게 물어 답을 얻었다고 합니다. 피티아는 월계수 아래 앉아서 신탁을 전하는데, 신이 접근하면 월계수의 이파리가 떨린다고 합니다. 문제는 필요한 경우에 조작이 가능하였고 당시 많은 사제들이 타락해 있어, 적당한 뇌물로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65쪽)


<세 길이 만나는 곳>은 프로이트가 구강암으로 처음 치료를 받던 1923년 4월 20일 빈의 병실로 찾아온 테이레시아스(델포이의 사제이며 오이디푸스 비극의 마지막 장면에 증인으로 나옵니다)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두 차례의 만남 이후에 15년을 건너 뛰어 1938년 9월 8일 런던의 한 병원에서 재회하면서 본격적으로 오이디푸스신화를 설명합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가운데 만남이 성사되는 것을 보면 꿈속이거나 환상 속의 만남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통하여 정신분석학을 틀을 세운 프로이트인 만큼 꿈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하여 작가는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장례식 직전의 만남에서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적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현실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깜깜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생각할 것이 많을 것 같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목에 등장하는 ‘세 길’은 그리스 포키스 지방에 있는데, 테베로부터 오던 길이 파르나소스산 부근에서 두 길로 갈라지는 장소입니다. 한쪽은 델포이를 향하여 북서쪽으로 뻗는 가파른 골짜기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파르나소스 산의 기슭을 감싸며 다울리스의 비옥한 평원을 향해 동쪽으로 휘어진다고 합니다. 갈라진 길이 등장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납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길은 모두 같고, 모든 길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지나가지게 되는 것(46쪽)’이라고 테이레시아스는 전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숭배하는 신들이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폭력도 서슴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부당한 일도 저지른다고 비난합니다. 반면 프로이트는 ‘신’이란 건 자연의 부당함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원시적 욕망이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 부분을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비해서 읽으면 잘못은 라이오스가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물론 그의 네 자녀까지 저주에 휘말려야 하는 것은 신의 부당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이디푸스의 행동을 원시적 욕망으로 본 프로이트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서 불과 3일 만에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품에서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와 메로페에 입양되어 성장하지만, 자신과 관련된 신탁을 듣고는 왕궁을 떠난 것을 보면 프로이트가 세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론이 기본부터 잘못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탁의 오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오이디푸스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가정환경과 그가 라이오스에게 신탁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테이레시아스는 폭력가정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고 정부를 끌어들인 후에 집을 떠나 델포이로 가서 사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하여 테베에 왔다가 델포이로 돌아가는 길에 델포이로 신탁을 구하러 가는 라이오스를 만나게 됩니다. 라이오스는 길을 걷는 테이레시아스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라이오스가 구한 “만일 내가 자식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83쪽)”라는 질문을 받은 것은 테이레시아스였습니다.


순간 테이레시아스가 뇌리에 떠올린 것은 세 갈래길에서 만난 라이오스가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었습니다. 연상은 자연스럽게 폭력을 당한 젊은이가 지팡이를 빼앗아 마차에 탄 라이오스를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으로 이어졌고, 그런 아버지에게서 태어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거라는 직감이 휘딱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이오스왕이여. 당신은 아들을 얻게 된다. 그리고 아들은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것이다.(84쪽)”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신탁인 것처럼..... 피티아는 곁에 있었지만 격렬하게 떨리는 월계수가지를 손에 쥔 채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청년 오이디푸스가 델포이신전을 찾아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구하는 장면도 적절하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즉 아폴론이 신전을 떠나고 없는 시기라서 피티아가 쉬는 날이었음에도 신탁을 구하려는 코린토스청년 즉 오이디푸스에게 답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려했던 것인데, 오이디푸스가 순응하지 않자 끔찍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티아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합니다. 피티아가 사라진 다음에 테이레시아스는 고향인 테베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분명치 않은 듯합니다. 라이오스가 델포이에 갔던 것은 아들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테베의 골치덩이가 되고 있는 스핑크스에 관한 답을 구하려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신탁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오이디푸스와 만나 죽임을 당했던 것인데, 신탁의 선후가 다소 모호한 것 같습니다.


라이오스 사후에 집정관에 오른 이오카스테의 남동생 크레온은 스핑크스를 처치한 사람에게 테베의 왕위와 이오카스테와의 혼인시킨다고 공표합니다. 그런데 이오카스테는 남편 라이오스가 죽고 재혼을 하는 마당에서 아들과 재혼하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확인해볼 생각은 왜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그것도 네 자녀를 낳을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생후 3일된 아들과 헤어졌으니 얼굴로 알아볼 수는 없었겠지만 신탁을 고려한다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아니면 오히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결혼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오이디푸스에 관한 신탁이 내려진 이유가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살해한 것이었던 것을 보면, 라이오스는 미소년에게 더 관심이 많은 남색취향이었기 때문에 이오카스테는 그런 남편에게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임신을 기피했던 것은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이미 받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오스를 취하게 한 다음에 관계를 맺어 오이디푸스를 낳은 이오카스테의 선택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라이오스가 아들 낳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테베의 왕위가 끊어질 위험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탁의 위험을 알면서도 신에 도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오카스테는 신탁이 아폴론의 것이 아니라 사제로부터 들은 것이고 알고 있었고, 자식을 바라는 자신의 바람을 거부하려는 라이오스의 핑계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테베에 역병이 돌았을 때, 해결방안을 묻기 위하여 델포이에 신탁을 물으러 크레온을 보낸 이유도 의문입니다. 당연히 오이디푸스가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델포이의 신탁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던 것이라면 특히 그렇습니다. 테이레시아스도 그 점을 지적합니다. 오이디푸스왕이 직접 신탁을 구했더라면 다른 해결책을 들었을 수도 있었고, 같은 해결책을 다르게 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크레온이 가져온 신탁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테이레시아스 역시 오래 전에 해결된 일을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말하지만 이번에는 오이디푸스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정리해나갑니다. 자신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듣고 코린토스를 떠났던 것처럼, 오이디푸스는 참이 아닌 거짓은 받아들일 수 없는 순수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자고 싶거나 아비를 죽여야 할 욕망 같은 것은 애시 당초 없었습니다. 다만 그의 불행은 알려고 하지 말아야 했던 진실을 알려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안락함보다는 진실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신과 델포이의 신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저의 오해가 풀리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탁에서 도망칠 수는 없지만 신탁과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탁이 완성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치명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요즈음 즐겨보고 있는 <쓸쓸하고 찬란하神(신)-도깨비>에서 신이 전하는 “운명은 내가 던진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갈라진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라 갈라지기 전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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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 모르고 공부하지 마라 - 1등급을 만드는 자기주도학습의 힘
권승호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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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업무를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와의 인연이 참 질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부와 관련된 책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공부도 모르고 공부하지 마라>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권승호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공부 제대로 하는 법을 담았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입시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므로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읽어 가다보니 그 옛날 선생님들께서 강조하시던 말씀도 있을뿐더러 변한 세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공부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에 옮기느냐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는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현장을 지키고 계신 선생님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요점 같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남들이 한다고 무턱대로 따라하는 것은 틀림없이 실패를 불러올 것입니다. 질병의 치료마저도 개인별 특성에 맞추는 맞춤의학시대인 만큼 공부 역시 개인의 특장을 잘 살린 맞춤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권승호선생님은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모두 6개의 범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공부를 잘하기 위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건강한 신체에 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근본적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마음가짐을 다잡는 준비가 필요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효율적인 학습방법’입니다. 저도 무작정 읽고 외우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공부도 요령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 요령을 정리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어휘력과 사고력이 중요하다’입니다. 맡고 계신 국어와 한자 부문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만, 사고력은 수학과 과학 등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주도학습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송아지를 물까지 끌고 갈 수는 있습니다만, 물을 먹는 것은 송아지 하기에 달렸습니다. 공부도 남이 대신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남의 머릿속에 쑤셔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스스로 알아서 하는 공부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수업 시간, 이렇게 하라’입니다. 옛날 생각을 해보니 수업을 빼먹기도 했습니다만, 빼먹은 수업을 따라가려면 열배 아니 백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은 맡으신 수업에서 최고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다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부모와 교사, 이렇게 하라’입니다. 물론 공부는 학생들이 하는 것입니다만, 부모와 선생님들이 많이 격려해주고 도와주면 공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 좋았습니다만, 특정인을 짚어서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적은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재임하고 계실 때는 독단적인데다가 남을 배려하지 않는 독설에 사람들이 지쳐갔던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누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가르치기보다는 누군가를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옳은 지를 가르쳐 스스로 평가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맞춤공부에 앞서 누구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은 물론 따라야 하겠습니다. 1. 사교육을 당장 그만 두어라, 2. 11시 30분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라, 3. 스마트폰을 해지하라, 4. 일요일은 하루 종일 쉬어도 좋으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자기주도학습을 하여라 등 네 가지가 기본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목숨걸고 공부하지만 생각과 다른 결과를 손에 쥐면 누구나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는 좋은 공부 안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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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지는 시대 - 디지털 기억은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가
애비 스미스 럼지 지음, 곽성혜 옮김 / 유노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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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대학에 다닐 무렵 만든 진료봉사 동아리의 40년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었을 때의 정신을 40년 뒤에 들어온 후배들에게 온전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사물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생각도 시대정신에 맞추어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과정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 동아리를 만들 때부터 기록을 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주었지만, 학교 사정 때문에 동아리방을 몇 차례 이전하는 가운데 많은 기록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활동했던 회원들의 기억에 의존하여 역사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 회원들과 회원들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를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문화사학자이자 디지털 콘텐츠 큐레이터인 애비 스미스 럼지의 <기억이 사라지는 시대>는 이런 저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라지고 없을 때 디지털 기억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가’로 이해되는 이 책의 원제목 “When we are no more: How digital memory is shaping our future”에는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의 기억이 미래에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통찰을 담았습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개인 기억의 용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기억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디지털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옛말대로 저자 역시 그 답을 과거로부터 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불멸의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필멸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기억은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혹은 집단의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적어도 인간의 영적 불멸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인류가 처음 개발한 기억을 후세에 전하는 방법은 구술입니다. 구술방식의 전승은 일단 인간의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구술내용의 정확도라거나 구술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등, 여러 제한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의 ‘외주화’가 가능해지면서 입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외주화’는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외부 장치에 위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그림이나 기호로 표시되던 것이 문자를 발명하면서 기억의 보존이 보다 효율화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기록문화는 기원전 3,000년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수메르 문명이 남긴 것입니다. 그들은 갈대줄기(스타일로스)를 이용하여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새겼습니다. 기원전 2,400년 전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두루마리 종이를 이용하였으며,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100년 무렵 양피지를 개발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 무렵 골편에 기록을 남긴 흔적이 있고, 기원전 800년에는 대나무를 잘게 쪼개서 글을 적고 가죽끈으로 이를 묶어 보관하는 죽간이 등장했으며, 기원전 105년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였습니다. 채륜의 종이는 당시 사용되던 제지술을 개량하여 다량생산이 가능한 근대적 방식을 적용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문자의 발명에 이은 종이의 발명은 기억의 외주화에 두 번째 혁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혁신은 인쇄술의 개발입니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발하였습니다만, 금속활자를 이용한 서책의 대량생산에 성공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야말로 기억 외주화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할 만합니다. 디지털기술의 발전에 따른 정보저장의 획기적인 확대는 네 번째 혁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디지털 기록과 인간의 기억이 결합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고 디지털이 주도하게 될 앞으로의 세계에서 인간의 기억의 의미와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기획은 저자가 근무하던 의회도서관이 1억번째 소장품을 들인 것을 기념하여 1997년 개최한 기획전이었다고 합니다. 전시된 물품 가운데 토마스 제퍼슨이 초안을 마련하고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저 셔먼, 로버트 리빙스턴 등이 교정을 본 <독립선언문>의 초고가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여행에 지쳐 전시물에 별다른 관심을 쏟지 않고 휘적휘적 지나치던 관람객들이 진한 검은색 잉크로 줄을 좍좍 긋고 행간에 휘갈겨 쓴 글씨를 알아보려고 전시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저자는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 50년 아니 200년 뒤에는 무엇을 전시하게 될 것인가. 실체가 없는 디지털 자료로 되어 있는 과거를 미래의 인류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큐레이터로서의 고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디지털 기억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책에 담아냈습니다. 그러다보니 구성이 다소 산만한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자는 아직도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작은 걸음이며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저 과거와 미래라는 기억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는 책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 기억의 심원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이 지점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억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 어떻게 지식공유를 위한 기술과 맞물려 인간의 잠재력을 확대해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디지털시대 기억의 풍요를 제어하려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직면하게 될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선택을 고민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기억의 ‘외주화’가 발전해온 네 가지의 혁명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자는 외주화된 기억, 즉 정보의 혁명을 주도했던 네 차례의 변곡점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는 메소포타미아의 글자 발달로, 이는 행정과 상업, 수집품의 전문적 관리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두 번째는 고대 그리스의 도서관 발달로, 이 도서관들은 지식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을 육성하는 장소였습니다. 세 번째는 르네상스시기에 일어난 그리스와 로마 문예의 부흥과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이들은 서구가 현대사회로 발돋움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네 번째는 18세기 계몽운동으로, 이는 지식을 행위 동사로, 즉 진보하는 것으로 개조하고 국가의 책임으로 정보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데까지 확대시켰다는 것입니다.


기억과 ‘외주화’된 기억, 즉 정보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9개의 장으로 구분한 저자는 첫 번째 장에서 디지털 기억시대의 도래에 따른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과연 디지털 기록이 인간의 기억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설명입니다. 디지털기억은 개인을 둘러싼 인적 물적 자원과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가족, 친구들과 더 빠르게 연결되고 다양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이 너무 적은 것 못지않게 해롭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곡된 정보를 걸러낼 수 있어야 하고, 폭주하는 정보들 가운데 필요한 것만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이런 과정이 번거로워 정보의 취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매사에 긍정적인 듯합니다. 인류문명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처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디지털 세계에 적응하는 세 가지 방식을 설명합니다. 첫째, 과거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해 더 많이 배우며, 둘째, 자연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복잡한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데이터 세계를 조직하고. 셋째, 암기와 검색과 회수에 관한 업무를 우리보다 뛰어난 기계에 위탁하고, 기계중심세계에서 번영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서적이고 창의적 역량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기억으로부터 조립하는 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분량의 디지털 기억을 검증하여 객관적인 사실로 정제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2장으로부터 5장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인류의 기억이 탄생하는 순간으로부터 기억을 보존하는 기술이 발전해온 단계를 설명합니다. 물론 아담과 이브를 인용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만, 저자는 4만년전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의 정신활동을 물리적으로 기록한 것을 기억 외주화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정교하게 그려진 짐승과 새의 그림이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인도네시아 등의 동굴벽에 남아 있습니다. 그밖에도 조개, 뼈, 금속, 상아 등으로 만든 장신구와 악기, 주물 등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시절 만들어진 도서관은 단순하게 책을 보관하던 장소가 아니라 배움과 학문의 전당이었습니다. 즉, 기억의 보관과 확산을 주도하는 중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실물 도서관 이외에도 기억술을 개발하여 기억의 궁전이라는 가상도서관에 정보를 쌓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으로 문자의 발명이 기억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문자의 발명으로 그것을 배워서 쓰는 사람의 정신에는 망각이 자라날 것이다. 그들은 기억하는 훈련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2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크라테스의 경고는 기우에 불과하였습니다. 기억을 외주화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생물학적 기억은 작은 규모에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날 디지털 정보를 검색하는 기술에 의존하여 기억하기를 소홀히 하는 우리 역시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6장에서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외주 기억의 폭증을 다루었습니다. 지식을 소외시키고 ‘우리의 외부로’ 내보냈기 때문에 생긴 이런 현상에 대하여 저자는, 우리가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내주고 그 대가로 외부 세계에 대한 어마어마한 통제력을 얻어냈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경고한 도덕적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음입니다. “현대문화 속에서 가장 강력한 가치의 보고는 흔히 도덕 가치의 담론과 거의 연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과학] 지식이다(230쪽)”라고 한 역사학자 스티븐 섀핀의 말은 음미해볼만 합니다.


7장과 8장에서는 기억의 생물학을 설명하였는데 기억이 드러내는 과거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감정은 이성을 좌우하기도 하는데, 우리의 뇌가 더 많은 정보를 수용하려고 애를 쓰는 만큼 새로운 정보에 폐쇄적이게 되는 역설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은 경험의 축적이기도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기억이 세계를 ‘정확하게 그러하게’ 기록한다면 상상은 기억을 핵심적인 ‘마치 그러한 것처럼’으로 바꾸고, 경험을 추정으로 변형한다.(271쪽)”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미래를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상상력보다는 경험에 더 의존하게 되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배제하기 위한 생존전략 때문일 것입니다. 상상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9장은 기억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저자의 조언을 담았습니다. 책을 적지 않게 읽고 있는 저도 최근에 실감하게 되는 문제입니다만, 기억에 저장되는 정보의 내용보다는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고 그것을 찾아내는 방법을 기억하려 애쓰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옮긴이가 요약한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정보 인플레이션’ 속에서 우리가 처한 위기는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디지털 기억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와 그 디지털 기억의 소유권과 관리의 의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하는 두 가지라는 점이 해결해야할 숙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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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
바바라 오코너 지음, 이은선 옮김 / 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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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으로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던 바바라 오코너의 신작 <위시>를 읽었습니다. 전작에서처럼 흩어지는 가족관계 속에서 위기에 빠지는 어린이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습니다. 다행인 것은 <위시>의 주인공 찰리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주인공 조지아처럼 엉뚱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삶이 팍팍했던지 주변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는 약해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믿음을 꼭 쥐고 있습니다.


찰리가 쌈닭이 된 것은 아마도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모릅니다. 툭하면 쌈을 벌이던 아빠가 교도소에 수감되고, 엄마는 우울증이 심각해지면서 찰리를 돌볼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와 같이 살던 롤리[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로 랄리(Raleigh)라고 부릅니다만...]를 떠나 콜비에 살고 있는 이모와 이모부에게 맡겨지게 됩니다.[흥미로운 점은 콜비는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사라 데센(Sarah Dessen)의 소설 <Keeping the Moon(1999)>, <The Moon and More(2013)>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롤리 사람들이 콜비 사람들을 이르기를 촌닭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오코너가 그린 콜비는 완전 깡촌인가 봅니다. 제가 가본 롤리도 별거 없습니다만, 그래도 도시에서 온 찰리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터, 오자마다 롤리로 돌아갈 궁리를 하는 찰리지만, 책가방 짝꿍 하워드의 엽엽한 돌봄에 조금씩 굳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이모와 이모부 역시 찰리의 형편을 잘 이해하고 있어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려는 마음이 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도 진심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위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책의 주제는 소원을 비는 일입니다. 그런데 찰리에 따르면 소원을 빌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마도 누가 소원을 빌어서 이루어진 사례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찰리가 처음 소원을 비는 장면은 길에서 주운 1센트 동전을 힘껏 던져 숲에 들어가기 전에 소원을 비는 모습입니다. 별동별이 떨어지는 사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우리네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소원을 빌 수 있는 순간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고, 대체적으로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어야 하기 때문에 소원을 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소원도 매일 한번 이상은 빌어야 되는 모양입니다. 찰리가 매일 비는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하워드가 매일 비는 소원이라면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인데 뭐하라 비느냐고 빈정대자 찰리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테니 그렇지!" 소원을 비는 일은 찰리처럼 해야 하는가 봅니다. 사실 저도 기회가 될 때마다 몇 년째 비는 소원이 있습니다만,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거든요. 찰리처럼 절실하게 빌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저도 찰리처럼 소원을 빌어볼 생각입니다.


소원, 즉 꿈의 성취와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이미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에서 우리의 구호는 “꿈★은 이루어진다”였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코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일구어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꿈은 없는 셈입니다.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학교활동을 '발레, 축구, 싸움'이라고 적었던 찰리가 변해가는 모습을 읽어가면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형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리얼리티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현실상황극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고 부모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은 아이를 그렇게 만든 부모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부모의 조급함이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가는 것이지요.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지켜볼 줄도 아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참 독특합니다. 아이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같은 시선으로 상황을 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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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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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존재가 화젯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드라마 <찬란하고 쓸쓸하신神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은 고려말 장군인데 환관의 음모로 죽음을 당하고 935년 동안 불멸의 존재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산 사람이 아니니 불멸을 논할 대상은 아니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멸을 끝낼 도깨비신부를 애타게 찾아온 것을 보면 불멸의 존재 도깨비가 죽음을 그리는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필멸의 존재이나 불멸을 꿈꾸었던 진시황이었다면 이런 도깨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불멸을 끝내려던 도깨비가 불멸을 끝내줄 수 있는 도깨비신부를 만나고서는 생을 연장하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집 <알레프; http://blog.joins.com/yang412/12879477>에 실린 첫 번째 단편 ‘죽지 않는 사람’의 주인공이 불멸의 존재가 됩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재위기간; 284년 ~ 305년) 휘하의 군단 사령관이었습니다.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갠지스 강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있다는 인간을 죽음에서 깨끗하게 하는 비밀의 강을 찾아 헤매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불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 나섰고, 결국 그 강을 찾아 물을 마시고 불멸의 존재가 되어 세상을 떠돌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가 20세기 초 에리트레아 해안의 어느 도시 외곽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다시 죽는 존재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불멸의 존재가 되었던 그가 다시 필멸의 존재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죽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를 모두 살아본 그는 두 가지 형태의 삶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 http://blog.joins.com/yang412/4112614>에서는 불멸의 존재인 인조인간이 사랑하는 여인이 죽음을 맞게 되자 살아갈 의미를 잃고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사랑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위대한 힘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불멸의 존재가 필멸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필멸의 존재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불멸을 꿈꾼다는 것처럼, 불멸의 존재 역시 필멸의 존재처럼 무언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픈 불멸주의자>의 저자들은 인간이 불멸을 꿈꾸게 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며, 죽음의 공포는 역설적으로 예술, 종교, 언어, 경제, 과학의 발달을 이끌었다는 ‘공포관리이론’을 세우고 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등 세 명의 저자는 1970년대 말에 캔자스대학에서 실험사회심리학 박사과정에 등록하면서 만났는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이해하려는 열망을 공유하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를 공통의 주제로 연구해왔습니다. 1980년대 초에 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을 만나게 된 것이 ‘공포관리이론’을 가다듬는데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커는 “인간 행위는 죽음을 부정하고 초월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라고 하였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근원적으로 무력하다는 통렬한 인식을 바탕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덕성과 문화를 연마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이 베커의 이론을 바탕으로 ‘공포관리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사회심리학 전공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도 했는데, 사회학, 인류학, 실존철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연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설은 어느 정도 타당해보이지만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심리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공포관리 이론은 심리학은 물론 타학문에서도 수많은 연구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사실이 가장 고귀한 인간의 행동이나 가장 비도덕적인 인간행동 양쪽 모두의 바탕을 이루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통찰이 어떻게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진보로 이루어질 수 있는 지 고찰하는 것을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류학, 고고학 등 타 학문 분야에서 거둔 연구 성과를 망라하며, 과거와 현재의 구분 없이 관련된 사례라면 그 검토결과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서문에서 요약한 것을 토대로 설명하면, 이 책은 모두 11개의 장을 3개의 부로 구성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관리하기, 사물체계, 자존감-굽히지 않는 용기의 토대 등 3개의 장으로 된 제1부 ‘공포관리’에서는 공포관리이론의 기본 원리와 공포관리의 양대 기둥이라 할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을 소개합니다. 호모 모르탈리스, 실제 불멸성, 상징적 불명성 등 3개의 장으로 된 제2부 ‘세월을 관통하는 죽음’에서는 ‘우리 선조에게 죽음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와 ‘그들은 죽음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고대사를 탐구하였습니다. 인간파괴 해부, 육체와 영혼의 불편한 동행, 가깝고도 먼 죽음, 방패의 틈,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등 4개의 장으로 된 제3부 ‘현대의 죽음’에서는 언젠가 죽는다는 암시가 개인 및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아울러 현대 세계를 이해하고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처할 때 이 이론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았다고 합니다.


동물도 죽을 때를 안다고 합니다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성을 갖추면서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생긴 실존적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마련에 나섰던 것입니다. 바로 문화적 세계관이라는 개념입니다. 종교를 통하여 영혼이 새로운 형태로 환생한다고 믿게 되었고, 인간이 창조한 다양한 문화적 유산은 자손을 통하여 존속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불멸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관리이론의 두 축,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 불멸과 상징적 불멸을 이루려면 스스로가 문화 안에서 꼭 필요한 일원이라고 느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에 극복하는데 있어 자존감이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존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발보아 고등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무료급식의 사례를 인용합니다. 이 학교의 무료급식대상학생 들 가운데 37%만이 급식을 먹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돈이 있는 아이들은 급식실에서 팔고 있는 피자 같은 음식을 사먹더라고 무료급식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점심을 먹였는데, 형편이 되는 집에서는 급식비를 내지만 형편이 안되는 집에서는 급식비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구분 없이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급식비를 면제받는지는 선생님들만이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는 전체 학생 무료급식제도는 잘못 설계된 것입니다. 급식비를 낼 형편이 되는 아이들로부터 급식비를 받아 음식의 질을 높이는데 쓰게 된다면 급식을 먹지 않은 아이들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료급식이라는 허울 좋은 정책이 아니라 질 좋은 급식을 모든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들은 의례, 예술, 신화, 종교 등의 순서로 발전하면서 문화적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진화과정에서 죽음을 인식하게 된 인간들이 비탄한 감정을 덜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시작한 의례를 초자연적 존재에게 희망사항을 기구하는 형태로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노래 춤으로 시작하였을 의례는 상황이 어려울 때는 희생물을 바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어서 예술이 등장하게 되는데, 예술 역시 현실세계를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초자연적인 세계의 존재를 구체적 표상으로 보여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의례와 예술은 신화를 창조하고, 궁극적으로는 종교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의례, 예술, 신화, 종교 등을 인류의 인지적응 과정이 낳은 불필요한 부산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인간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낳은 이 산물들은 초기 인류가 ‘죽음 인식’이라는 인간 고유의 문제에 대응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다.(1345쪽)”라고 단언합니다.


실체적 불멸을 추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고대나 현대에도 달라진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연금술을 통하여 불사약을 만들던 옛날 방식이 있는가 하면, 현대에는 불멸이 가능할 때까지 죽은 자를 냉동시키려는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의 사례도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연장이 일부에서 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실체적 불멸은 여전히 요원한 수준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징적 불멸은 어느 정도 자리잡아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에서도 실체적 불멸을 대체할 상징적 불멸을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는 노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군사, 정치, 경제, 과학, 운동, 문학, 예술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특출함을 드러내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역설적으로 범죄행위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히틀러나 기원전 356년 그리스 에페소스의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 역시 인류 차원의 범죄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히틀러는 그렇다고 쳐도 헤로스트라투스는 생소할 수도 있는데, 그는 단지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고 하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꼽히던 아르테미스신전에 불을 지른 청년입니다. 2008년 남대문에 불을 질러 전소시킨 채종기씨의 이름이 가물거리고 있지만, 헤로스트라투스는 사건 당시 에페소스의 관리들이 인류의 기억에서 지워야 할 이름으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름이 전하는 것을 보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만큼 명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심리학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고 합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에는 중심방어기제를 활성화시켜 죽음이라는 불편한 생각을 억누르거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죽음이라는 문제를 먼 미래의 일로 미룬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에는 말단방어기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이 경우 죽음이라는 문제와 아무런 논리적, 의미론적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문화적 가치를 거부하는 타인을 폄하하거나 자존감을 북돋우려 하는데,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상징적 불멸성을 획득하여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죽음의 공포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중심방어기제와 말단방어기제는 동시에 작동합니다.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방패에도 틈이 있는 것처럼 빈틈이 없을 듯한 죽음의 공포에도 틈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뻔한 적이 있는 사람과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노년층은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물질적 부유함보다는 친밀한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덜 두려워하고, 이에 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한다면 죽음과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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