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모던 산책 - 도쿄의 기억기관, 근대에서 오늘을 읽다
박미향 지음 / 지에이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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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목차에 있는 일본근대문학관, 모리오가이 기념관, 소세키 산방기념관, 와세다대학 연극박물관, 가마쿠라문학관, 가와바타 야스니라 자료관 등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어 읽게 되었습니다.


<도쿄 모던 산책>은 국회도서관 국회기록보존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방문학자로 와세다대학교에서 2년간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여는 글에서 여행이나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복기하며 기록할 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시인이나 예술가가 된다.”라고 적었습니다.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기록관 등을 폭넓게 살펴볼 수 있었는데, 함께 간 건축가 남편과 함께 책과 전시를 둘러볼 수 있었고, 일본의 역사와 문학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런 기관들을 기억기관이라고 하며 자신을 기억기관 칼럼니스트라고 칭했는데, 국회도서관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면서 남겨야 할 기록과 기억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커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도쿄를 중심으로 한 여러 기억기관들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현재에도 의미 있게 해석되는 일본의 문화적 기억자산을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일본의 근세를 정리하고 지금도 남아있는 근세의 흔적을 살펴보았습니다. 2부에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서 에도 시대의 흔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저자는 근대와 근세를 세계인 또는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한눈에 비교해 살펴볼 수 있도록 세계사적 사건과 지식문화의 흐름을 연표로 정리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교 대상 기간 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지는 분명치가 않을뿐더러 서구, 일본 그리고 한국과 중국을 하나로 묶어서 비교해놓은 것이 적절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부의 모두에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의 사회상을 정리해놓았는데, 문학 분야도 한 꼭지 들어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는 모리 오가이를 근대 일본문학의 거장으로, 나쓰메 소세키를 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인 대문호로, 다야마 가타이를 자연주의 문학과 수많은 기행문을 남긴 작가로, 히구치 이치요를 근대적 자아의식을 반영한 탁월한 여류작가로 소개하였습니다. 다이쇼 시대에는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간결한 문체로 사소설 영역을 넓힌 시가 나오야, 추리소설 작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한 에도가와 란포 등을 소개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쇼와시대의 대표적 문인으로는 무뢰파의 대표작가인 다자이 오사무, 탐미주의 소설의 대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을 꼽았습니다. 사실 어느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을 꼽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작가가 꼽은 문인들 대부분은 이번 일본근대문학기행을 통하여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기는 했습니다만, 처음 알게 되는 문인들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도쿄는 물론 지방에 있는 몇 곳의 유적(?) 60여 곳에 관한 사항을 정리해놓았는데, 이들의 특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 뒤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많은 곳을 살피다 보니 각각에 대한 설명이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만 다양한 그림과 풍부한 사진이 곁들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에 있는 문예 분야의 기념물들 가운데는 처음 알게 된 곳이 많아서 도쿄에 다시 갈 기회가 있으면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작가가 체류하던 시기에 이들 기억기관에서 기획한 특별한 행사들은 도쿄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같지는 않습니다만, 2021년에 산토리 미술관에서는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소장품의 기획전이 열렸다고 합니다. 세계 역사를 대표하는 9만점이 넘는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 일본 수집품이 방대하다고 하였는데, 1990년대에 가보았던 미니애폴리스 미술관에서 그런 작품들을 보았던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이 책에서 짚어 놓은 박물관, 미술관, 문학관 등은 도쿄에 갈 기회가 있으면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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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씨 부자 창비세계문학 13
라오서 지음, 고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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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떠날 예정인 펀트래블의 중국근대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라오서의 <마씨 부자>입니다. 1899년 베이징의 만주족 정홍기(正紅旗) 가정에서 출생한 라오서의 본명은 수칭춘(舒慶春)입니다. 출생 이듬해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베이징 3중학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국비장학생으로 베이징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습니다. 졸업후 소학교, 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 동양학부 중국어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29년 귀국길에 싱가포르에서 반년을 체류하면서 화교중학에 재직할 무렵 <마씨 부자>를 발표했습니다. 영국에서의 삶을 작품에 녹여낸 것으로 중국이 아닌 영국을 배경으로 한 중국인들의 삶을 그려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낙타 샹즈>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작품들이 중국 하층민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반하여 <마씨 부자>의 경우는 다른 작품들과는 기조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관리가 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허송생활하면서 형님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던 마쩌런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골동품상을 하던 형님이 죽으면서 물려준 가게를 운영하기 위하여 아들 마웨이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베이징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에번스 목사와 인연을 맺었던 덕에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작가는 영국에서 체류할 때 목격한 영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처지를 기록해놓았습니다. “런던의 중국인은 대략 노동자와 학생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노동자 대부분은 런던 동부 지역에 살았다. 그곳은 중국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차이나타운이었다. 이곳을 찾는 유럽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아편, 무기밀매, 살인, 강간 등이나 저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음흉하고 더러우며 혐오스럽고 비천한 두 다리 동물이라고 상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작가는 중국인이여! 눈을 부릅뜨고 보라! 눈을 뜰 때가 되었다! 허리를 곧추헤워야 한다. 허리를 곧추세울 때가 되었다! 영원히 개가 되지 않고자 한다면!(24)”이라고 절규합니다. <마씨 부자>의 창작 동기는 중국인과 영국인의 다른 점을 비교하여 민족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합니다. 영국인과 중국인의 문화와 민족성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인종간의 대립이 이 작품에 담긴 핵심 갈등구조입니다. 에반스 목사가 마씨 부자가 거처할 하숙집을 어렵게 구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에 대한 영국인들의 편견이 드러나게 됩니다.


에반스 목사는 딸과 함께 사는 과부 웬델부인을 설득하여 마씨 부자가 입주를 하게 되는데, 아버지 마쯔런은 웬델 부인을, 아들 마웨이는 딸 메리에게 반하게 됩니다.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 가운데 웬델 부인은 마쯔런의 선물공세에 넘어가 마음이 조금 기울게 되지만, 메리는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습니다.


마쯔런은 형님이 남긴 골동품 가게의 운영에 나서지만 장사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마웨이와 형님 생전에 가게에서 일하던 리쯔룽에게 가게의 운영을 넘겨주게 됩니다. 중국에서도 대충대충 살아가던 마쯔런의 버릇은 런던에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형님이 남겨준 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가게를 잘 운영하여 수입을 늘리려야 한다는 현실감각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체면을 유지하기에 급급합니다.


마웨이는 그런 아버지와는 달리 현실감은 있어 리쯔룽과 함께 가게운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한편 에반스 목사의 딸 캐서린으로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또한 메리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캐서린에게 묻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는데, 이를 본 중국인 청년들이 캐서린을 창녀라고 비난하고 나서는 바람에 마웨이가 나서서 사과를 요구하면서 싸움이 붙었고, 대마침 식당에 온 캐서린의 동생 폴과 치고받기에 이릅니다.


중국 청년들과의 싸움은 마쯔런이 에반스 목사의 처남 알렉산더의 주선으로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과 연관하여 런던에 사는 중국인들이 골동품가게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웬델 부인과의 결혼도 장애를 만나게 된 마쯔런은 골동품가게를 팔아치우기로 합니다. 실망한 마웨이는 결국 런던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마쯔런과 마웨이로 대표되는 신구 세대간의 갈등이 <마씨 부자>의 두 번째 갈등구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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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산보
다니구치 지로 지음,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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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누군가의 책을 읽다가 읽기희망도서 목록에 올려두었던 것인데 만화인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독후감을 쓰려고 자료를 조사하다가 박미향의 <도쿄 모던 산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사실은 강상중교수의 <도쿄 산책자>의 독후감을 찾아 헤매던 중이었습니다. 구스미 마사유키의 만화 <우연한 산보>의 내용이 <도쿄 산책자>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구회사에 근무하는 중견 영업사원 우에노하라가 근무 중에, 또는 휴일에 나갔던 산보에서 발견한 일상의 다양한 풍경들을 담았습니다. 쿠스미 마사유키가 글을 쓰고 다니구치 지로가 만화를 그렸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만화 <고독한 미식가>를 그려냈다고 합니다. <고독한 산책가>에서처럼 우연히 나선 산책에서 무언가를 발견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만화를 그려낸다는 기본적인 틀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연한 산보>에는 모두 8개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이어서 글을 쓴 쿠스미 마사유키가 후기를 대신하여 산책 원작 작업을 진행해온 과정을 사진과 함께 설명했습니다. 만화를 쓰고 그리시는 분들에게는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마사유키는 <우연한 산보>의 만화작업을 시작하면서 1. 조사하지 않는다, 2. 옆길로 샌다, 3.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등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주인공의 산책이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책 원작 작업에 이어 <우연한 산보>에서 다룬 8가지 이야기의 뒷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거나 실제 인물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제목 그대로 우연한 산책이다 보니 산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1에디슨의 전구에서는 스산할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에서 쇼와 시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골목에는 예전에 살 뻔한 집도 있었습니다.


2시나가와의 셋타에서는 “TV나 잡지에 나온 곳을 찾아가는 산책은 산책이 아니다. 이상적인 산책은 태평한 미아라고나 할까(22)”라는 대목을 발견합니다. 일상적인 산책이라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나 교토에 있는 철학자의 길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우연한 산책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어떻든 시가가와에서도 거리풍경이 지방같다는 느낌을 받고, “옛날엔 이 길을 상투 틀고 짚신 끌고 다녔던 거지. 관서지방처럼 번성하기를 꿈꾸면서. 그게 불관 100년 전이라니 참 신기해.(23)”라고 말합니다. 주인공은 시나가와의 신발가게에서 세타를 사고 목욕도 하지만 정작 찾아간 가게는 폐점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흐르는 강물 위에 걸린 다리에 선 주인공은 우리는 50년 뒤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27)”라고 말합니다.


7하모니카 요코쵸에서는 이 만화를 그리기 전에 정한 원칙이 이야기됩니다. “이런 골목길은 가이드북 같은 것에 의지하지 말고 그냥 걷는게 재미있는 거 아닌가요? 조금 불안할 정도가 재미있는 것 아닌가요? 걷다보면 반드시 재미있는 가게나 물건이 나오는,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골목이거든요. 그리고 산책은 관광과는 다르죠.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 데서 오는 기쁨이거든요.(76)”


마지막 8메지로의 카키모치에서는 해외에서 구매 상담을 온 외국인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외국인은 카와카미 소쿤이 일본어 교과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가공의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암투병기 <죽고 싶지 않아!>였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 산책이었다고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와서 신기했습니다. 어쩌면 병환이 위중하여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요?


그 외국인 구매자를 숙소에 바래다주고는 우연히 종업원 출구로 나오는 바람에 이상한 거리로 나섰는데,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동네 가게들이 이어지는 곳에서 카키모치를 사기도 하고, 남자의 성기를 뜻하는 칭칭과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오망코에서 한글자씩 따온 칭망(珍萬)이라는 식당에서 쇼유라멘을 사먹기도 합니다. <고독한 미식가>의 흔적을 담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연한 산보>를 우연히 읽고 귀중한 생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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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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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누군가의 책에서 발견한 책입니다. 아마도 단절되었던 가족들과 다시 만남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서 느낀 점은 제가 간헐적으로 쓰고 있는 생애의 발자취를 정리하는데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동쪽으로 147떨어진 랭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과는 달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일을 해서 지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것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지만 어머니는 약속한 대로 2학년까지 학비를 지원해주었다고 합니다.


랭스에는 과거 카페왕조의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른 노트르담 드 랭스 대성당이 있습니다. 랭스의 인구가 19만 명인 점을 보면 작가가 모두에서 이야기하는 1950년대 주민 수가 50명도 되지 않았다고 적은 것을 보면 랭스의 교외에 있다는 뮈종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나 봅니다.


파리에서 대학을 다닐 무렵 고향에 발길을 끊었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고향을 찾아 어머니와 옛날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이 책의 서두에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고향을 등진 것은 아버지의 폭력과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타인들로부터 받아야 했던 시각이 불편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어머니의 죽음 뒤에 그를 덮친 절망과 그의 존재를 변화시킨 넘어설 수 없는 고통에 관해 매일매일 기록했다. 그의 노트를 읽을 때면, 나는 그의 비탄과 고뇌가 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느낀 감정과 얼마나 다른지 헤아려본다. ‘나는 애도하고 있지 않다. 나는 고통받고 있다.’ 그는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일어난 일에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썼다. 내게는 그 일이 무엇이었을까?(20)”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어떤 감정이 남았던지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배경과 철학을 공부하고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저자가 좌파를 넘어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다만 그런 행로를 따라가면서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좌편향된 자료들만 찾아 읽었을 뿐 우파와 관련된 자료들은 굳이 외면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질 들뢰즈가 아베세데르(L’abécédaire)에서 좌파라는 것먼저 세계를 내다보는 것” “멀리 내다보는 것이며, 반대로 좌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 집중하는 것으로 정의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좌파 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나온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좌파들은 그들이 저주하던 우파의 행보보다 더 우파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좌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좌파나 우파나 아무 차이가 없어. 모두 똑같은 놈들이야. 늘 당하는 사람들만 당하는 거지.(146)”라고 말하던 에리봉의 어머니 생각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머니의 지원이 끝나고 학업을 이어가기 위하여 그는 중등교원으로 10년간 근무해야 하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임용시험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의무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할 곳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동성애적 성향임을 알게 되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그런 공간을 찾곤 했는데, 그렇게 만난 친구의 주선으로 만난 인연이 소개해준 잡지 리베라시옹에 기사를 쓰다가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좌파 성향의 신문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피에르 불디외, 미셸 푸코 등과 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르주 뒤메질과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의 대담집도 쓰게 되었습니다. 에리봉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게이 문제에 관한 성찰><소수자의 도덕>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서야 고향 랭스로 돌아간 저자는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랭스로 되돌아가다>에 담기로 했습니다. 다만 단순히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아닌 이론서를 지향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에는 푸코와 부르디외,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리다. 바릍, 들뢰즈 등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물론 아렌트 세즈윅, 버틀러, 천시 등의 외국 이론가, 장 주네, 마르셀 푸르스트, 앙드레 지드, 마르셀 주앙도, 오스카 와일드, 아니 에르노 등 작가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생소한 이론들은 이해가 어렵기는 했습니다만, 저자가 인용한 원서까지 읽어보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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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5 - 로마 세계의 종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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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편의 독후감을 쓰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제목을 단 <로마인 이야기1>를 읽기 시작한 것이 2023623, 그 독후감을 누리사랑방에 올린 것이 202384일입니다. ‘로마 세계의 종언이라는 제목을 단 <로마인 이야기15>202572일에 읽기를 마쳤습니다. 무려 2년하고도 열흘을 더한 세월이 걸렸습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것도 <로마인 이야기1>40일 걸렸던 것보다는 절반 정도에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로마 세계의 종언 역시 하루 저녁에 끝난 것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세계사에서 배우기로는 서기476년에 서로마제국, 즉 로마제국은 훈족과 스키리아인의 피가 반씩 섞인 게르만의 헤룰리족 출신의 플라비우스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 호물루스 아루구스툴루스를 쫓아내면서 문을 닫았습니다. 오도아케르 역시 로마제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로마황제를 칭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섭정으로 서로마를 통치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15>의 제1최후의 로마인에서 서기395년부터 410년까지 시기를 다루었고, 2로마제국의 멸망에서는 서기 410년부터 제국이 막을 내린 476년까지를, 3제국 이후에서는 서기 476년 이후의 로마사람들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15>의 시작을 서기 395년으로 한 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로마와 서로마를 혼자서 통치하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회의 진흥에 힘쓴 점을 공인하여 콘스탄티누스에 이어 대제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로마제국은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 물려 준 동로마제국과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물려준 서로마제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3세기 말에도 사두제를 운용하여 각지의 국경에서 도발하는 서로 다른 야만족들에 대처하는 분담통치 방식을 유지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만, 두 아들은 황제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등을 돌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던가 봅니다. 두 아들이 전장에 나서 전투를 지휘한 경험도 없고, 국정에 참여한 경험도 없어 황제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에 얄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먼저 움직여 동로마제국을 침공하였습니다. 서고트족의 침공을 막는 임무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을 부탁한 스틸리코였습니다만,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방에서 데려간 병력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고 총사령과 스틸리코는 서방병력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서로마제국의 궁정은 환관들이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은 동방에서 이주해온 아타르의 훈족에 밀려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상호 지원을 통하여 야만족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었는데 그와 같은 협력체제가 무너지면서 힘이 빠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총사령관 스틸리코가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야만족의 침략에 대응할 만한 장수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오도아케르에게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앞서 적은 것처럼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황으로서 동로마제국의 섭정에 만족하게 됨에 따라서 동로마제국이 서로마제국을 통치하는 모양새를 가짐에 따라서 로마제국의 멸망을 476년이 아닌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으로 보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도아케르는 17년간 이탈리아를 통치할 수 있었지만, 동고트 부족의 테오도리크에게 밀려 실각하게 됩니다. 테오도리크로부터 동고트왕국은 33년 동안 이탈리아를 지배하지만 결국은 동로마제국에게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이어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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