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성폭력의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라는 부제는 <용서의 나라>라는 제목과 함께 호기심과 많은 의문이 들게 만듭니다. 아이슬란드의 인기작가 토르디스 엘바와 호주에서 청소년지도사로 일하는 톰 스트레인저가 어떻게 만나 성폭력이라는 악연을 쌓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리고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 굳이 다시 만나 아픈 기억을 복기해야만 했던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야기를 모두 읽어야 16년에 걸쳐 이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사건과 그 뒷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10대에 만난 두 사람은 연인이었는데,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의 피해자를 의사에게 데려가는 대신 두 시간에 걸쳐 강간함으로써 젊은 시절 피해자의 삶을 갈가리 찢어놓았던 그 남자는 피해자의 첫사랑이었다고 했습니다. 데이트폭력의 전형인 셈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인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왜 문제가 되느냐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선은 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 용서라는 절차를 굳이 가지려는 이유가 일종의 스톡홀름증후군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은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말하는데, 일부 매맞는 아내 혹은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 빠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앞둔 피해자가 강간사건 이후에 무너진 삶을 추슬러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아이슬란드와 호주에 사는 두 사람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결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성폭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장소라는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10대 연인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간 사건은 1996년이었는데, 2000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가 헤어졌고, 2005년부터는 두 사람이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벌여졌던 이야기들을 복기하기 시작한 것을 2013년에는 드디어 케이프타운에서 직접 만나 아흐레를 같이 보내면서 마지막 감정을 정리하기까지의 오랜 과정을 담담하게 적어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이런 과정이 필요했던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건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특히 피해자의 경우 사건 이후 삶의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행동이 오히려 자괴감을 불러오게 되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은 결자해지라는 문제해결방안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입니다.

참 어려운 만남이었을 것 같습니다만,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도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어느 정도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탓인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인지 두 사람은 담담하게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케이프타운에서 일주일에 걸쳐 만나는 과정을 보면 두 사람이 기억하는 사건의 내용과 그때의 심리상태에 대하여 분명치 않았던 부분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고, 그 결과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성폭력은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묻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용서의 나라>는 사랑 혹은 연인관계라는 가면 아래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로잡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용서의 핵심은 짐을 덜되 그 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 거야. 그 짐이 그 사람의 몫이라 하더라도 말이야’라는 피해자의 생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용서하는 과정을 통하여 힘든 삶을 살아온 두 사람 모두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주목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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