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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기술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 지음, 김영선 옮김 / 심심 / 2017년 6월
평점 :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억이 예전 같지 않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럴 때면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가 부럽기만 합니다. 푸네스라는 농부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에 보고 들은 것들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심지어는 특정한 날, 하늘에 뜬 구름 모양 같은 자질구레하고 세세한 사항까지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푸네스는 푸네스대로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쌓여가는 기억 때문에 괴로워지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담아두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지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래서 ‘기억은 신의 선물이고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는 말이 생긴 모양입니다.
브라질의 신경생물학자 이반 안토니오 이스쿠이에르두는 학습과 기억이 저장되는 기전연구의 선구자입니다. 기억을 연구하는 그가 역설적으로 ‘망각의 기술’을 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기억과 망각은 동전의 양면 같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는 ‘기억은 뇌에서 벌어지는 정보의 저장과 인출로 정의되고, 망각은 기억상실이라 일컫는 기억의 손실로 정의된다’라고 말합니다.
기억하면 흔히 장기기억과 단기기억으로 구분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내용의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술기억’인데, 서술기억은 의미, 이해,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에 대한 기억인 ‘의미 기억’과 일화에 대한 기억인 ‘일화 기억(삽화 기억)’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감각 또는 운동 기능에 대한 기억은 ‘절차 기억’ 혹은 ‘습관’이라고 합니다. ‘작업 기억’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기억은 기억이 저장되고 인출되는 기전과 관련된 접속체계를 말합니다. 기억의 종류에 따라서 작동하는 뇌의 부위가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기억이 형성되는 기전을 분자생물학의 수준에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기억이 뇌의 어딘가에 쌓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신경세포들을 연결하는 시냅스를 통한 신호전달체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험이 일단은 뇌의 언어로 번역되어 기억흔적이나 기억파일로 응고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응고화된 정보는 뇌의 다양한 부위에 있는 시냅스망에 뇌의 언어로 저장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필요할 때 불러올 수가 있는데 이를 ‘기억의 인출’이라고 말합니다. 뇌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인출되는 기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망각, 그러니까 경험한 것을 떠올리기 못하는 방식에는 습관화, 소거, 차별화, 억압 등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의 방식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으로의 접근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셈입니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학습의 형태입니다. 일종의 망각의 기술인 셈입니다. 따라서 경험한 것을 송두리째 없애는 진짜 망각은 아닌 것입니다. 망각의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치매에 걸린 환자의 뇌를 보면 신경세포가 죽어 사라지거나 시냅스가 손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망각이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저자는 기억의 기전은 물론 기억의 훈련, 망각이 필요한 이유, 망각의 기술이 질병치료에 이용되고 있다는 것 등, 다양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명들의 체계가 다소 혼란스럽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기억과 관련된 과학적인 연구는 물론 문학작품 등 다양한 소재를 인용하고 있어 기억에 관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어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앎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한 느낌입니다.
기억을 연구하는 저자가 망각을 논하게 된 이유를 나가는 말에 정리하였습니다. 망각은 새로은 기억을 저장하는 공간을 만든다는 점, 대부분의 기억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다는 점, 기억제거방법으로 알고 있는 망각은 소거, 습관화, 변별학습 등으로 기억과정을 억제하는 것일 뿐으로 기억의 장기적인 폐기에 불과하다. 더하여 저자는 ‘우리가 망각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