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의 인생수업
장석주 지음 / 한빛비즈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음악으로 영화로만 기억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만, 다시 새겨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조르바의 삶에 매혹된 장석주 시인께서 쓴 <조르바의 인생수업>을 읽게 된 것입니다. ‘나는 왜 이 책을 쓰는가?’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살다보면 어떻게 살지 막막한 순간이 온다’라고 서두를 뗀 시인은 그런 순간에 구원을 내미는 ‘운명의 책’이 있고,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런 책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스무번도 넘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언제 처음 읽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거린다면서도, 가난한 청춘시절 방황의 시간 속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만났다고 적었습니다.


<조르바의 인생수업>은 게으름을 피우느라 3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어록들을 분류하고, 시인의 생각들을 덧붙이고 하나하나에 제목을 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격동하는 시대를 용맹하게 뚫고 나아간 조르바라는 인물의 어록을 통해 그의 경험과 지혜를 배우는 ‘인생수업’이다(31쪽)”라는 요약이 가능하게 만들어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단숨에 써내려갔더라면 설익은 생각들이 제각각 춤을 추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책은 2부로 구성되었습니다. ‘조르바의 인생수업’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는 시인의 기힉대로 조르바의 어록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정리하였고, ‘피의 여로(旅路),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와 문학’에서는 실존인물 조르바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그리스인 조르바>에 담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설명을 담았습니다. 1부는 마치 원작소설을 대역(對譯)하듯 배치하였습니다. 짝수 쪽에는 원전의 어록을 담고, 홀수 쪽에는 시인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주제들이 뒤섞어 헷갈리게 될 것을 우려한 탓인지 매 주제마다 새로운 쪽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 여백이 많은 편이지만, 그 여백에서 읽는 이도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와 같은가 봐요(46쪽)’의 경우처럼 아주 짧은 문장을 인용한 경우도 있는데, 시인은 조르바의 생각에 공감하면서, ‘이들은 세상의 모든 악과 부조리에 반항하고, 낡은 도덕들을 갱신하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다’라고 추겨 세웁니다. 이어서 ‘이 세상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아요(50쪽)’라는 구절을 인용한 시인은 ‘인간이 다른 어느 동물보다 병약하며 불안정하고, 변화하기 쉽고,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은 한마디로 고뇌하는 동물이다’라는 니체가 <도덕적 계보>에서 갈파한 인간의 정의를 인용하여 ‘사유하고, 고뇌하는 것’만이 인간이 제안의 야만성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그가 시인이 태어난 해에 ‘공교롭게’ 죽었다고 적은 것에 슬그머니 웃음이 일었습니다. 시인 자신이 카잔차키스와의 연결고리를 맺어보려는 노력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난 크레타 섬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다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10세기 무렵 아랍인들이 점유하던 크레타섬을 차지한 비잔티움은 살아남은 아랍인들을 크레타의 바르바리에 몰아넣었고 합니다. 카잔차키스의 선조는 이들로 이어지는 까닭에 강한 자부심, 고집스러움, 모짊, 검약함, 비사교성과 같은 아랍인의 기질이 녹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타의 자유를 빼앗아간 터키에 대한 증오를 키워갔다는 것은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카잔차키스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바로 1917년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인물을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존인물 조르바와 같이 했던 시간들을 통하여 맺어진 열매였습니다. 무려 사반세기가 지난 1943년 <그리스인 조르바>의 초고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조르바를 다시 기억하고 시인의 재해석을 통하여 ‘자유로운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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