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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 - 세계현대작가선 8
께이스 노오떠봄 / 문학세계사 / 1997년 4월
평점 :
절판
히딩크감독 덕분에 많이 가까워진 네덜란드입니다만, 문학동네에서는 그전에 이미 네덜란드 작가 께이스 노오떠봄을 소개하였던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생소한 느낌의 기행소설이라는 장르의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으로 말입니다. 기행소설이라 함은 기행문의 일종이면서도 일관된 주제가 설정되어 있으며,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세련되게 조형화하여 주제를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작가 자시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노오떠봄은 사물에 대한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인상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그의 다양한 형식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는 여행 중에 자주 묘지를 찾아가는데, 그곳을 거짓된 감상을 배제하고 인간들의 도난당한 삶들을 모아놓은 도서관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계, 한 명의 여행자(1989)>에서 밝힌 그의 여행관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왜 여행을 하느냐고 자주 묻는다. 그럴 때면 아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지금, 왜 내가 여행을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은, 내가 자의적인 한 사람으로, 비옷을 입고 고물자동차에 탄 채 이제는 더 이상 연기가 나지 않는 굴뚝들이 서 있는 폐허가 된 공장지대를 지나고 있는 것과 같다. 내 입장과는 무관한 것, 순간의 우연성, 장소의 임의성 바로 이런 것들이 여행의 이유다.”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은 일본, 페르시아, 감비아, 독일, 영국, 마데이라, 말레이시아 등의 여행기록을 담았습니다. 그는 현지의 신문 속에 나타나는 정치, 경제, 문화적 사건들을 인용하며, 예술과 건축에 대한 미학적 분석을 담기도 합니다. 때로는 정치적 현안을 역사적, 문화사적 시각에서 풍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첫 번째 여행기록인 ‘천황의 생일, 문물의 파토스와 다른 일본 체험’이라는 제목의 동경여행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그의 기행문은 이내 한 장의 사진을 끌어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열두어 살 때 보았던 사진인데, 손을 묶인 채 눈을 가린 호주 전쟁포로가 앉아있고, 그 뒤로 커다란 칼을 양손으로 쳐들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일본의 정원, 사찰, 꽃다발 등을 보면서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일본체류에 대하여 그는 “나는 일주일 내내 물 위를 걸어다녔다는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30쪽)”고 적었습니다. 특히 전에 보았던 공원에 있는 연못의 검푸르고 비단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물 위를 계속 글어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물의 밑바닥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을 정도로 투병하지 못했지만 내 몸을 지탱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물 위를 나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 문화가 외형적으로는 서구화된 듯하지만 이질적인 면이 있고, 특히 나라는 낯선 사람은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944년 사이판섬의 일본군 집단자살사건, 가미가제 조종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옥쇄함으로서 본토를 사수하자는 등의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원자폭탄의 사용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개진하기도 합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은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한 페르시아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비밀스러운 빛’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스파한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심이자 압바스왕조의 거점이라서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