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흔히 ‘~벌레’라고 부르면 무엇에 빠져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을 이릅니다. <책벌레>도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책을 좋아해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때로는 책밖에 모르는 사람을 조롱하는 의미로도 쓴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진짜 책을 갉아먹는 서두(書蠹)라는 일종의 진드기를 의미하는 한자어를 가져와서 책을 많이 읽기만 하고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뮌헨대학에서 체계이론을 가르치는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책벌레 이야기를 독특한 구조로 구성한 소설입니다. <책벌레>은 두 개의 이야기와 책읽기에 관한 짧은 아홉 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는 200여년의 시차가 있어 각각 다른 주인공이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면 앞의 이야기가 뒷 이야기의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소설은 책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살인과 강도짓으로 얻은 돈으로 책을 사들인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받은 작센주 포르제나의 목사 게오르크 티니우스의 사건을 축으로 작가가 창조한 팔크 라인홀트가 2세기 뒤에 6만권을 수집한 티니우스가 출판한 다섯 권의 책을 뒤쫓으면서 티니우스를 닮아가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팔크 라인홀트는 요한 게오르크 티니우스의 전기를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그 자신이 티니우스의 텍스트가 되었다.(151쪽)” 무슨 일이든 집착이 생기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책읽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저자는 누구의 글이라고 콕 짚어주지는 않았지만, 아주 익숙한 글귀들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처음 대하는 구절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팔크는 마들렌을 먹을 때처럼 단어들을 오래 전에 식어 씁쓸해진 차에 적셔 입에 넣고는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천천히 혀로 굴렸다.(109쪽)”라는 대목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집 쪽으로; >의 한 장면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아홉 개의 양탄자들은 글과 작가, 독자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짧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양탄자에서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를 인용하여 글의 의미를 논하였습니다. 두 번째 양탄자에서는 ‘최초의 작가는 누구일까?’하는 질문을 내놓은 저자는 ‘자연이 한 권의 책’이라고 한다면 신이 최초의 작가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세 번째 양탄자에서는 배움의 방법을 논하는데, 기억력보다는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네 번째 양탄자에서 말하는 책에도 얼굴이 있다는 설명은 아마도 글 쓰는 이마다의 색깔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독서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다섯 번째 양탄자는 크게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독서의 체험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한 자루의 도끼와 같다(117쪽)’라는 놀라운 비유를 인용한 것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책의 세속적 측면을 다룬 여섯 번째 양탄자도 독특한 면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책은 우리 자신과 동일화시킬 대상을 제공하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한 일곱 번째 양탄자는 아무래도 제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독자는 공작새다’라는 제목의 여덟 번째 양탄자도 생각거리가 많은 항목입니다. “맹목적이고 게으른 심성은 대부분의 독자들이 앓고 있는 전염병(179쪽)‘이라고 비유한 것을 보면 저자는 독자의 분발을 에둘러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양탄자 ‘독서의 기술’이야말로 이 책의 화룡첨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내가 기대하는 독자란 적어도 세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독자는 침착하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독자는 독자 자신과 자신의 ‘교양’을 개입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독자는 책의 말미에 일종의 결론으로서 ‘도표’들이 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197쪽)”라는 구절이야말로 저자가 이 책을 읽은 이에게 당부하는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홉 개의 양탄자는 저자 나름대로의 독서의 문화사였던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