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 로마제국쇠망사 1
에드워드 기번 지음, 김희용.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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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문명이 부딪힌 현장을 돌아보면서 역사를 되짚어보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터키와 발칸반도로 이어지면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로마제국의 유적들을 보았을 때, 제국의 역사를 더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방대한 분량에 선뜻 집어 들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시작하면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독후감을 정리하는 것은 지나치게 개괄적인 것이 될 듯해서 한권 한권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즉위한 시점을 시작으로 보지만, 카이사르가 제국의 바탕을 만들었고,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의 틀을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제국의 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혹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은 고대 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가 로마라는 도시를 건설했다고 전하지만, 이는 허구적인 전설이라고 합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이탈리아반도에 흩어져 살던 여러 부족들이 전쟁과 교류를 통하여 융합하게 되었고, 그 핵심은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과 기원전 8세기 중엽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로 건너온 그리스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8세기 무렵 이들을 중심으로 통합된 것이 고대 로마의 시작이었고, 초기에는 도시국가 형태의 왕국이었습니다. 기원전 500년 무렵 왕정이 무너지면서 귀족들과 평민계급에 의한 공화정이 시작되어 계급간의 투쟁과 타협이 이어지면서도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던 것입니다. 기원전 272년에는 이탈리아반도에 흩어져 있던 도시국가들을 아우르게 되었고, 이어서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여 지중해 전역으로 영역을 넓혔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로 이어지는 80여년의 행복한 시기(서기 98-180년)로부터 시작합니다. 제국 쇠망의 중요한 상황들을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기획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기번은 로마제국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로부터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동로마제국이 망한 시점까지 대략 1,300년 동안을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일련의 변화를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기는 로마의 군주정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쇠퇴하기 시작하여 고트족에 의하여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동로마제국이 영광을 구가하던 시기로부터 이슬람세력의 발호로 제국의 위엄이 축소되어가다가 서기 800년 샤를마뉴의 프랑크왕국이 제국을 재건하기까지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이로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까지를 말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1>에서는 서기 98년-180년까지 안토니우스 가의 황제들 시대의 로마제국의 범위와 군사력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4세기 초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퇴위 이후 혼돈에 빠진 제국을 추스르기까지와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대체적으로 혈족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3대 이상 이어진 경우는 별로 없으며, 근위대의 무력에 기대어 제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위대의 기대치에 따라서 황제가 바뀌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로마군의 특징은 속주 혹은 정복지에서도 차출되는 병력의 비중이 컸기 때문에 출신성분이 비천하더라도 군생활을 통하여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 최고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군의 위세에 힘입어 황제위에 오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능력위주의 사회였던 모양입니다.


1권의 마지막 2개의 장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던 로마제국의 정책에 따라 급속하게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게 된 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신학적 해석이 힘을 얻으면서 로마의 상징인 신들을 경배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의 하나였으며,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 신학적 해석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적과 순교 등을 부풀려졌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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