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호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5
리카르도 피글리아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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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신문기사나 글을 읽으면서 필자가 행간에 숨겨둔 의미를 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책을 다시 읽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올 초에 다녀왔던 아르헨티나 작가 리카르도 피글리아가 더러운 전쟁기간 동안에 내놓은 소설 <인공호흡>입니다. 읽어가는 내내 이 책이 소설인지 아니면 아르헨티나 문학사에 관한 책인지 종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작가가 주인공인 작가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행간에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작품해설을 읽으면서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공호흡>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1부는 프란스 할스의 그림 제목이기도 한 ‘내가 어둡고 움울한 겨울이라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제2부는 ‘데카르트’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제1부는 <현실의 지루함>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삼촌 마르셀로 마기교수의 삶에 얽힌 비밀을 다룬 소설가 에밀리오 렌시가 외삼촌과 주고받은 편지로 구성된 서간문형태의 이야기가 앞부분에 등장합니다. 19세기 애국자 엔리케 오소리오의 삶을 재구성하여 진실을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는 마기교수는 조카에게 역사에 대한 시야를 넓게 가지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렌시가 마기교수의 부탁으로 그의 장인 루시아노 오소리오 상원의원을 찾아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대화내용은 아르헨티나의 역사와 그 안에 담겨있는 법칙 같은 것입니다.


1부의 마지막 부분은 정보기관의 검열관으로 보이는 아로세나가 등장해서 가로챈 편지에 숨겨진 메시지를 추적합니다. 이 부분에서 바로 행간에 의미를 담는 글쓰기라는 옛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전혀 다른 맥락의 글이 섞여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 점에 관하여 당시 엄격했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읽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제2부는 렌시가 외삼촌 마기교수를 찾아 콩코르디아를 찾아가지만 마기교수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마기교수를 기다리면서 폴란드에서 망명온 타르뎁스키와 아르헨티나 문학의 전통과 잠재력에 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르헨티나 문학에 미친 유럽문학의 영향으로부터 아르헨티나의 독자적인 행보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글쓰기와 관련해서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미래의 소설을 쓰기 위해 나는 과거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현재(이러한 공백이자 미지의 땅) 또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으리라.(116쪽)” 유토피아는 오직 시간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세상에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설의 제목과 관련하여 군부독재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문학에 한줄기 숨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읽었습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이야기의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엉뚱해보이는 화제를 이끌어다 비유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의 위작에 관한 그루사크의 책으로부터,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단테의 <신곡>, 심지어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틀러가 1909년 10월부터 1910년 9월까지 거의 1년 동안 빈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강제징병을 기피하기 위해서 체코의 프라하로 숨어들었더라는 것입니다. 프러시아 군국주의의 옹호자이며, 군국주의 사회를 건설한 당사자가 사실은 병역기피자였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실제와 허구를 교묘하게 짜넣었다고 하니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문학과 현실/역사,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읽기’와 삶의 세계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였다고 옮긴이는 정리합니다.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아르헨티나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한 책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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