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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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했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저자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읽게 되었습니다. 과연 완벽하게 반쪽으로 나뉜 인간이 각각 생존 가능할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이 선함과 악함을 공유하고 있다고 저자는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함만으로도, 혹은 악함만으로도 완벽하지는 못하다는 생각에 동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꼬투리잡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말이 안되는 상황이 너무 많기는 합니다. 포탄이 맞아 조각이 난 젊은이의 신체를 긁어모아 반쪽의 몸을 만들어내는 신묘한 의술도 그렇구요, 포탄이 부족한 포병부대가 화약가루를 보충하기 위하여 흙을 채로 친다는 상황설명도 그렇습니다. 나머지 반은 수도자들이 구해서 또 다른 반쪽을 살려냈다는 설정도 그런데, 몸의 오른쪽이 악함을, 왼쪽이 선함을 대표한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은 메다르도자작의 불행이 시작된 기독교도와 투르크간의 전쟁은 아마도 교황의 요청에 따라서 오스만투르크를 상대로 했던 십자군 전쟁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만, 십자군전쟁이 1095년부터 1456년까지 진행되었고, 오스만제국이 아나톨리아, 즉 지금의 터키반도 전역을 정복한 것이 1481년이며, 십자군을 패퇴시켰던 것이 1444년이니 아마도 이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유럽의 기독교군대에 위안소가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병영입구 한쪽에는 천막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화려하게 수놓인 비단옷을 입고 가슴을 드러낸 채 천막 안에 서 있던 뚱뚱한 여자들이 그들을 복 고함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11쪽)” 일본군이 러일전쟁 때 러시아로부터 위안소 운영을 배워왔다는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저자는 반쪽으로 나뉜 메다르도자작을 통하여 인간의 이중인격을 나타내려 한 것 같습니다. <반쪼가리 자작>의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두 가지 성격이 충돌하는 다중인격장애를 앓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이중적 가치기준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들어와 그런 성향이 더 강화되어가는 경향에 대하여 작가가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자작이야 그렇다고 쳐도,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한센병 환자들, 종교적 윤리를 내세워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위그노들을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 많은 사람들 역시 비정상적인 생각과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 작가는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런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극단으로 치우친 것들을 가운데로 이끌어내 균형을 맞추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함과 악함의 양 극단에 있는 각각 반쪽의 메다르도자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작가는 사랑을 내세웠습니다. 즉 파멜라라는 젊은 여성을 악한 반쪽과 선한 반쪽이 모두 사랑하게 만든 것입니다. 나아가 파멜라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하나로 승화시켜보려는 시도를 하지만 두 사람의 갈등이 극대화되어 결투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고, 둘 중 하나가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 결투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악함과 선함의 반쪽들이 다시 하나로 결합하게 된다는 해피앤딩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많이 억지스러운 설정이지만, 동화 같은 소설이라서 충분히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쪼가리 자작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재결합한 다음에는 아주 현명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인간은 결코 현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현명한 자작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이 행복한 시대를 맞을 수 있었을까요? 세상이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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