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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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바닥까지 굴러 떨어진 인간들이 부리는 역겨운 탐욕으로 읽어나가기 힘들었던 <눈먼 자들의 도시; http://blog.joins.com/yang412/13929327>에서 끝까지 답을 얻지 못했던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위기에 처한 도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정부의 정체였습니다. 초급성 실명전염병이 발생하자, 놀랄 만큼 신속하게 초기 역학적 대응-발병한 환자는 물론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찾아내 격리시켜 전염병의 확산을 차단시키는-은 완벽하게 했던 정부가 격리된 환자들을 방치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은 <눈먼 자들의 도시>의 완결편이라고 할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실명 전염병의 확산사태가 종식되고 4년이 지난 뒤에 있던 선거에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으로 끊어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투표가 진행되는데 꼼짝을 하지 않던 시민들이 오후 4시가 되자 한꺼번에 투표소로 몰려나와 기표를 함으로써 선거관리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위기감을 덜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개표가 진행되어 종료되면서 사태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전체 유효표의 70퍼센트 이상이 백지였던 것입니다. 수도를 제외한 지방에서는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었다는 점이 차이입니다. 일주일 뒤에 선거를 다시 하기로 했지만, 결과는 더 나빠져서 백지투표가 83퍼센트에 이르게 됩니다.


백색실명에 이은 백색투표 사이의 연결고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실명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백색투표는 투표용지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역시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질책이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각의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백색실명사태가 종료된 다음 무기력한 대응으로 사태를 키웠던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없었던 것처럼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한 것에 대한 시민들의 무언의 시위였던 것입니다. 지우려한다고 해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백색투표가 백색실명과 연결된다는 점은 처음 눈이 먼 남자가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내무부장관에게 제보를 하여 백색실명 사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안과의사의 부인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인데, 아마도 그녀라면 백색투표와 같은 엄청난 일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제보한 사람은 최초로 실명한 남자였는데, 알고 보면 그 남자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았던 역겨운 군상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대통령과 총리는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처벌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수사하지 않기로 결정하지만 내무부장관은 이미 수사팀을 도시로 잠입시킵니다. 수사팀은 그녀는 백색투표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됩니다. 하지만 내부부장관은 이미 그녀가 사태에 중심에 있다는 각본을 짜놓기까지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비밀이 없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도 저자는 세상에는 살맛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만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한 기회주의자들이 벌인 무모한 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누군가 정의로운 일을 하는데 생명을 걸어야 한다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377쪽)” 우매하면서도 잔인하기까지 한 최악의 권력을 한껏 조롱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답은 침묵하고 있어 답답할 수도 있는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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