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간열차 - 꿈꾸는 여행자의 산책로
에릭 파이 지음, 김민정 옮김 / 푸른숲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부산에서 대구로 가면서 무궁화열차를 탄 적이 있습니다. 낙동강변을 따라 느리게 달리는 열차의 차창 풍경이 오래 전 기억을 되살려 주었습니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 여행이지만 KTX의 차창밖으로 둥둥 떠 흘러가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젊었을 적에 고향에 가면서 야간열차를 탄 적이 있습니다. 침대차는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만원인 열차에 겨우 입석으로 끼어 탔는 지라복닥 거리는 열차 안을 피해 승강대에 서서 컴컴한 밖을 내다보던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이러니 야간열차여행의 낭만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작가 에릭 파이의 <야간열차>에는 낭만과 환상 같은 것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공산독재시절의 동구권을 야간열차로 여행하면서 검문을 당하는 장면처럼 은근 긴장되는 장면도 있기는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곳곳은 물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몽골, 중국까지도 여행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이렇듯 다양한 장소를 그것도 야간열차를 타고 찾아가보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열차 안 풍경이 다소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열차여행에 관한 영화와 문학작품들을 이끌어와 여정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열차여행에서 크로노스, 즉 시간의 개념을 이끌어오는 비유가 놀랍습니다. 상대성이론으로 보면 여행하는 사람이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아주 조금이나마 덜 늙어 있다는 폴 랑주뱅의(Paul Langevin)의 ‘쌍둥이 형제 패러독스’가 그것입니다. 이 패러독스가 이론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해도 여행의 주는 신선한 경험은 생각에 여유를 주어 분명 젊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열차에 친숙한 것은 가족사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증조할아버지가 철도수리공이었고, 증조할머니는 건널목지기였는데, 할아버지 역시 역에서 근무를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내전에 휘말려있는 나라로 향하는 야간열차가 지나기라도 하면 선로변경장치를 감독하던 할아버지는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간철도여행을 발칸반도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김정일이 열차로만 여행하는 것을 꼬집는 장면도 나옵니다. 다른 독재자들처럼 비행기라면 질색을 하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차가 역에 잠시 멈춰 설 때면 우리는 다시 바깥세상과 연결되곤 했다.(200쪽)” 고 적은 것을 보면 열차가 달릴 때면 작가는 환상에 빠져드는 모양입니다. 열차여행에 관하여 작가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한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열차가 달리는 선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평행선하면 직선의 이미지가 휘딱 떠오릅니다만, 그런데 작가는 ‘모든 직선은 곡선이다’라는 아인슈티인의 말을 인용하여 그런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만듭니다. “철로가 제아무리 곧게 뻗어있다 한들 결국은 원을 그리게 마련이니까(270쪽)”라고 설명합니다.
장 레이의 단편소설 <슈크루트>에 등장하는, 아무 열차에나 올라 타 아무 역에서나 내린 다음 그곳을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을 흉내내다보니 발칸반도 끝에서 막다른 골목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알바니아의 러쏀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저자가 발견했다는 ‘쿨라’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찾아보았습니다. 쿨라(kulas)는 단단한 석조 가옥을 말하는데, 피스(fis)라고 하는 대가족으로 살았던 알바니아사람들의 오래된 전통 가운데 벤데타(vendettas)라고 하는 ‘피의 다툼’은 여러 세대에 걸치도록 이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다른 씨족의 공격으로부터 가족들을 방어하기 위한 가옥 형태가 쿨라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야간열차가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느림을 대표하는 야간열차도 버텨내기가 고단할 것 같습니다.